조용하다면 조용한 서점 한편에 마련된 카페 안에서 끊이지 않는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돌아보니 조용하다고 하기엔 어수선한, 다양한 소리가 집결된 곳 안에 있었구나 내가. 내 뒤편에서는 주말을 맞아 나온 아이들을 위한 행사에 형광 옷을 입은 관계자들이 톤을 높여 맞이하고, 그 앞에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같이 나온 엄마들과 아기 울음소리, 돌아가는 커피 기계 소리, 은근하게 볼륨을 맞춰놓은 클래식 음악에, 그럼에도 울리고 있는 알람 소리. 내가 적어놓은 페이지 332부터 한 권을 마저 끝내고 또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책 읽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 많은 소리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가방에서 꺼낸 여름 담요를 충동적이었지만 좋은 소비였다고 생각하면서 어깨에 걸치고 일어나 또 다른 책을 찾아 나섰다. 궁금한 작가의 책이 딱 1부 남았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있어야 할 자리에 제목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 누군가 다른 곳에 실수로 책을 꽂지 않았을까 하고 기름진 손을 턱에 괴고 코와 입에 대었다. 결국 아쉬운 대로 같은 작가의 유명한 서적을 잡아들고 자리로 돌아왔으나 그 책을 손에 든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뒤편에 다른 소설가가 적어놓은 평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소설가라 그런지 감상을 써도 감성적이네. 머리를 손에 받치고 다시 보던 페이지를 펼쳐 읽는데 오늘 뿌리고 나온 향기가 은은하다. 역시나 좋은 소비였다. 좋아하는 냄새라 그런지 질리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나가면 마트에 들러 디카페인 커피를 사고 책갈피도 사야지. 원래 놓여있던 자리를 찾아 책을 꽂아놓으려 일어나니 어느새 꽉 들어찬 사람들에 한 번 더 놀라고, 금세 지나버린 시간에 놀라고, 사다리 앞에서 피아노인지 관현악기인지의 악보를 보고 있는 사람, 필사를 하는지 연신 책을 보며 빨간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는 사람, 자신만의 공부를 하는 사람, 항상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도 사람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던 북 마리아나 제도(다른 명칭 사이판)의 '마리아나'는 당시 지배자였던 왕이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하물며 그곳의 꽃 이름에도 마리아나를 붙이는 로맨티시스트 식민지배자의 아이러니한 스토리가 어떤 구절에서인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다 말고 갑자기 떠올랐다. 그 마리아나 꽃은 꽃잎이 반쪽밖에 없는 형태인데, 연인이 서로 다른 반쪽을 뜯어 맞춰보고 그 모양이 딱 맞아떨어지면 영원하다나 뭐라나.
나는 성질이 굉장히 못돼먹어서 종종 별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말로 상대방을 찌르기도, 사실 일부러 사정없이 후드려 패기도 하는데, 그중 가장 내 성미가 발휘되는 것이 알면서도 무관심할 때이다. 무관심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믿는다. 눈칫밥 깨나 먹고살았지 내가. 그 세월을 무시 못 한다. 그저 내 눈에 보이고 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주로 모른척하거나 아예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 사람이 내 주의를 끌고 싶었든 아니든, 내게 알리고 싶었든 아니든. 나에겐 일정한 선이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관심 갖고 싶지 않은 일이 선을 넘어 다가오면 난 기어코 신경질을 내고 만다. 우리 엄마가 언젠가 그랬다. 엄마 본인을 포함해 살이 안 찌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게 다 성질이 못돼 처먹어서라고. 물론 그 사람 안엔 당신의 딸도 들어가 있다. 착하게 살자는 게 내 신념 중 하나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 스스로에게 이기적일 땐 이기적이자. 거절할 땐 거절하자. 요즘 열심히 찌고 있는 걸 보면 전보단 조금 유해졌나.
한동안 잠잠했던 머릿속이 다시 시끄럽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서 다른 소리를 찾아 틀어놓고는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