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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나Genna Oct 29. 2021

첫 기억을 두고 온 곳으로 자꾸 나아갑니다

존 컨스터블 <플랫포드 물방앗간>

최초의 기억을 따라서


역사학과 학부 수업을 청강할 때였다. 개강 첫 날,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물으셨다. 네 최초의 기억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예상치 못한 신선한 질문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없다. 기억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언제부터인가 아주 어린 나날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그 중, 정말로 최초는 아닐 수 있으나 유달리 최초의 기억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그보다 앞선 수많은 기억들은 사라지는 와중에 왜 그 기억만큼은 최초로 장기기억으로 저장됐을까? 그만큼 반복 발생했거나, 생존에 필요했거나, 깊은 정서적 각인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수님은 저마다 지닌 생애 첫 기억이 곧 자기 역사의 시작이자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씀하셨다.


내 최초의 기억은 만 네 살 때 일이다. 그때 우리 부모님은 주택청약에 당첨돼 '내 집 마련'의 기쁨을 가득 안고 서울에서 경기도 부천시로 이사한 터였다. 이제 막 신도시가 조성된 90년대의 부천은 아직까지 논밭이 남아있는 정겨운 공간이었다. 지금은 다 사라졌을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파트 뒷편에 포도밭이 무성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래서 우리 동네 이름이 포도마을이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의 유치원이 끝나면 외할머니가 나를 데리러왔는데, 할머니가 늦으면 나는 혼자 당당히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다보면 꼭 우리집 822동보다 한 블럭 앞에 있는 824동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내가 막 잘못 들어가려 할 때, 혹은 우리집이 아닌 걸 깨닫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할머니가 뛰어왔다. 헐레벌떡 달려오는 할머니, 저기가 우리집이라고 다시 한번 가르쳐주는 그 모습이 나의 첫 번째 기억이다.


내가 다 큰 성인이 된 후에도 할머니는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는 나로 인해 마음 졸였다고 했지만, 나는 그 에피소드를 들을며 도리어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다섯 살 짜리가 홀로 거침없이 10분의 모험에 나설 수 있을 만큼 그 동네는 참 작고 무탈했나보다. 그리고 아마 아이는 알았을 거다. 설령 잘못된 길로 들어서더라도 결국 자신을 집으로 인도해줄 할머니가 뒤따라올 거라는 것을. 그 안도감이 아이를 용감하고 씩씩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가 지닌 든든함이 부러워서일까. 지금도 새로운 삶의 국면 속에 마음이 불안할 때 유난히 어릴 적 그 공간이 그리워진다. 나의 첫 기억을 안고 있는 그곳은 그 외에도 나의 수많은 '처음'들이 성사된 곳이다. 엄마 아빠와 할머니, 온 동네 이웃들은 내가 돌파해야할 모든 '처음'을 응원해주었고, 그 힘으로, 폴짝폴짝 신나게 징검다리를 건너듯, 유년시절의 도전들을 하나하나 당차게 해내었다.


단편적으로 흩어진 기억 조각들일 뿐이지만 그 추억 속 따뜻한 온기와 평온한 감정들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동네 풍경들. 우리 학교, 성당,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젊고 건강한 엄마, 아빠, 할머니. 소녀의 가벼운 어깨와 천진난만함. 함께 뛰놀던 친구들과 사촌들. 언제라도 눈을 감고 떠올리면 그날의 시공간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세월과 함께 그곳이 내게서 계속 멀어져만 갈수록 내 마음은 자꾸만 더 그곳으로 돌아가, 사라지고 없는 것들, 기억 속에서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을 애도하고 그리워한다.



멀어지는 것을 붙잡고 싶은 마음


램지 리처드 라이너글 <존 컨스터블>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이다. 최초의 자연주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아주 정교하게 그려낸 그림들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가 한창 성장할 때, 그때까지 풍경화는 크게 주목 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18세기 예술의 대세에는 역사화가 있었고, 돈벌이가 되는 그림은 단연 초상화였다. 컨스터블은 둘 다 흥미가 없었다.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풍광에 쏠려 있었다. 다만 당시 풍경화의 주 대상이 유명 유적지·여행지 등이었던 반면, 컨스터블은 평범하고 친숙한 경관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고향을 향한 애정이 깊고 깊었다. 그는 잉글랜드 동남부 서퍽(Suffolk) 주의 이스트 버골트(East Bergholt)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스타우어 강이 사시사철 흐르고, 옥수수밭과 목초지로 가득한 작고 고요한 시골 마을이었다. 컨스터블에 따르면 그를 "화가로 만들어준 것"은 그곳의 풍경들이었다. 그만큼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존 컨스터블 <플랫포드 물방앗간> (1817). 유화. 50*60. 테이트 브리튼.


<플랫포드 물방앗간>(1817)은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감상한 컨스터블 작품이다. 작품은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플랫포드 제분소를 배경으로 한다. 강에는 두 대의 바지선이 떠있고, 제분소 직원으로 보이는 선원이 장대로 강바닥을 끌며 배를 움직이려 하고 있다. 배는 강가에 서있는 말과 밧줄로 연결되어 있는데,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 소년이 그 줄을 끊어주고 있다. 다른 소년은 이미 말 위에 올라타 친구가 어서 줄을 끊어내길 기다리고 있다. 이제 두 소년은 해가 지기까지 아주 신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푸르른 여름날, 시골의 일상적 노동현장과 천진한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진 정경을 보고 있자니, 시골에 살아본 적 없는 나에게도 유년을 향한 강한 향수가 피어올랐다. 마치 내가 말 위에 앉은 소년이 된 것 같았다. 사실 이 그림을 보기 훨씬 전에 컨스터블의 다른 작품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었다. 비슷한 목가적 풍경을 담고 있고, 심지어 더 크고 유명한 작품이었는데도 (<건초수레> 등) 감정적 파동은 미미했다. 한동안은 컨스터블이 꽤나 과대평가된 화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참 후 테이트 브리튼에서 <플랫포드 물방앗간>을 보았을 때 나는 조금 다른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때는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나는 서른이란 완숙한 나이로 나아가고 있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나간 것은 돌아올 수 없고,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실감나게 배우던 찰나였다. 컨스터블의 작품은 그제서야 나의 그리움을 자극하며 이전과는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19세기 초 잉글랜드 시골이 컨스터블의 풍경처럼 평화롭기만 하지는 않았다. 여러 사회적 변화와 함께 농촌생활이 점차 황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 흐름이었다. 그러나 유복하고 안정적으로 자란 컨스터블에게 시골 마을은 불안정한 현실과 대비되는 마음의 돛대 같은 공간이었다. 그에게 그림은 "감정의 다른 말"이었기에, 그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도 그 장면이 일으키는 정서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 기억 속 풍경이 주는 안정감으로 현재의 불안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려 한 이들은 컨스터블만이 아니었다. 영국의 풍경은 갈수록 컨스터블의 묘사와 멀어졌지만, 그럴수록 영국인들은 그의 그림을 '가장 영국적인 풍경'으로 칭송하며 좋아했다. 20세기가 되면 컨스터블은 어느새 '가장 영국적인 화가'가 되어있었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나와 컨스터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일까? 그것이 현실을 대하는 얼마나 건강한 자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스트랫퍼드 방앗간>(1820)
<주교의 정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1823)



삶의 길을 잃을 때마다


컨스터블은 대기만성형 예술가였다. 43세에 왕립 아카데미 준회원이, 52세에 정회원이 되었으니 세속적 기준에서 상당히 늦은 나이었다. 그의 영원한 라이벌, 동시대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는 그보다 한 살 많을 뿐인데 이미 26세에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이 된 바 있었다. 같은 나이에 컨스터블은 막 영국왕립미술원의 교육을 마치고 전문 풍경화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애초에 컨스터블은 터너 같은 야심가는 되지 못했다. 생전에 대내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화가 반열에는 올랐지만 금전적인 대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다. 이는 일정 부분 그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컨스터블 작품은 영국보다 먼저는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는 국제적 러브콜에 일절 응하지 않고 평생 영국을 떠나지 않았다. "해외에서 부자가 되느니 (잉글랜드에서) 가난하게 살겠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에게는 치열하게 명성을 얻는 일보다 고향, 가정, 조국 등 이미 가진 것 속에서 안락을 누리는 편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플랫포드 물방앗간>을 그리기 시작한 1816년은 이제 막 40세가 된 컨스터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 그는 깊은 상실을 경험함과 동시에 설레면서 두려운 새 시작을 맞았다. 사실 그의 30대는 그렇게 화려하지도, 평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직업에서나 개인적으로나 그를 고뇌에 빠뜨리는 상황이 더 많았다.


첫 번째 어려움은 화가로서의 불안정이었다. 컨스터블이 처음부터 고향 풍경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풍경화가의 길을 결정한 후 그도 당시의 관례를 따라 몇 번의 스케치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1806년엔 야심차게 호수지방(Lake District; 노스웨스트잉글랜드 산악지대)을 다녀왔으나, 그 결과물을 발표한 1807~1808년 전시회는 아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실패를 경험한 컨스터블은 그때부터 고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명소를 좇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기쁨이 되었던 풍경에 집중해 진심을 담아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둘째로, 사랑의 고통이 있었다. 1809년에 시작된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 1788~1828)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컨스터블은 화가 활동을 위해 내키지 않는 런던생활을 하며 상당한 정신적 압박 아래 있었다. 매년 여름만큼은 가장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서퍽에서 보내겠다 결심하고 고향에 오게 되었고, 이때 어릴 적 친구 빅넬을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문제는 빅넬 가족의 극심한 반대였다. 컨스터블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명 화가였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교구 목사였던 빅넬의 조부는 상속권 박탈을 빌미로 이별을 종용했고, 컨스터블의 부모는 관계를 허락하기는 했으나 컨스터블이 재정적 안정을 찾기 전까지는 결혼 자금을 대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도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마음이 혼란한 시기 컨스터블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이스트 버골트 곳곳의 풍경을 그리는 일 뿐이었다.


존 컨스터블 <스타우어 강 유역과 데덤 마을>(1814). 이 시기 고향에서 그린 작품 중 하나이다. 1813~1814년 사이 남긴 스케치만 200점이 넘는다.


삶의 새로운 국면은 생각보다 더 씁쓸하게 찾아왔다. 그의 세 번째 고통, 부모의 연이은 죽음이었다. 갑작스레 부모님의 건강이 나빠지자 컨스터블은 최대한 오랜 시간 집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그러나 곧 1815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감과 공허함을 느꼈던 때일 것이다. 슬픈 현실이었으나 아버지의 사망은 컨스터블에게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 자금으로 1816년 10월 마침내 빅넬과의 결혼을 올릴 수 있었다.


부모의 죽음으로 겨우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결혼을 승인 받은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부모에게 보답하고, 새로운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굳은 다짐을 하지 않았을까. <플랫포드 물방앗간>은 바로 이 시기, 결혼을 앞둔 여름에 그려졌다. 아버지의 방앗간은 그대로였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아버지도, 그 옆에서 마냥 즐겁던 자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컨스터블은 돌아갈 수 없는 유년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현실 속 자연에 투영해 철부지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넣었다.


X선 분석결과에 따르면 원본 그림엔 전경의 두 소년과 말이 없었다. 이후 수정작업에서 추가된 요소로, 현실에 없던 풍경을 화가의 기억을 토대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컨스터블이 고향 풍경을 실제로 보면서 그린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었다. 이후에는 새 가족과 런던생활에 적응해야 했기에 서퍽에 돌아와 오래 머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각박한 도시 삶 속에서도 평온한 시골의 경관은 늘 그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첫 아들이 태어난 이후 컨스터블은 꼭 세간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 가족의 생계가 달린 이때에도 그는 뚝심있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고향 마을을 계속 그렸다. 다만 직접 갈 수는 없기에 스케치와 기억에 의존했다.


결국 1819년 작 <백마>를 시작으로 조금씩 대중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컨스터블의 작품은 풍경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야기하는 정서로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여느 시골 마을을 그대로 옮긴 듯한 세밀한 묘사, 정겨운 등장인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각자가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너무나 평범하고 익숙하지만, 어느 순간 잃었고 되찾을 수 없는 광경.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애틋하고, 그립고, 슬프면서 즐거운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존 컨스터블 <백마>(White Horse, 1819)


컨스터블은 아주 개인적이고 내적인 사람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방향을 찾지 못할 때마다 그의 삶에 지표가 되어준 것은 고향의 풍경, 그리고 가족이었다. 그 지표를 따라 다시금 길을 찾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1828년 아내의 이른 죽음으로 다시 한번 극적인 슬픔에 빠졌을 때에도 그는 세 아들을 생각하며 삶을 지속했다. 아들을 향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했고, 그 그림 속 풍경은 항상 그리운 과거의 한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명예도, 행복도 언젠가는 다 소멸할 것이라는 불안이 늘 컨스터블의 마음 한 켠에 있었다. 그 냉혹한 현실에 반항이라도 하듯 그는 기억 속에서만이라도 한결 같이 존재하는 고향의 경치를 캔버스 위에 반복해서 그렸다. 그것이 그가 가변적인 삶 가운데 안정을 찾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경험과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모든 것이 빠르게 변모하는 시대에 사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도


컨스터블은 죽어서 더 이름을 날리는 화가가 되었다. 죽을 때만해도 뛰어난 자연주의 화가 정도였던 그는 19세기 말, 대체불가능한 국민화가로 신분상승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국적 아름다움"을 가장 잘 구현한 화가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국이 된 나라였다. 19세기 초부터 이미 농촌의 정경은 상당히 파괴되었고, 20세기 초에는 인구 80퍼센트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골의 논밭이 공장으로 바뀌고, 녹색 지대가 줄어들수록 영국인들은 영국의 전원(田園), 특히 남부 농촌 마을이 "가장 영국적인 풍경"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컨스터블이 활발히 활동한 1810~30년 대에도 농촌의 현실은 컨스터블 그림 속 유토피아적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농촌 경제는 위태로웠고, 시골의 정과 안락함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여기에 전쟁까지 기름을 부었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승리는 영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되었지만, 장기간 전쟁 속에 국민 삶이 피폐해지는 결과는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전쟁 이후 지속된 경제불황은 농촌 사회에 더 큰 타격을 입혀 곳곳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나게 했다. 컨스터블의 풍경은 이러한 현실이 배재된 상태에서 화가의 기억과 감정이 덧입혀진, 어느 정도 상상의 산물이었다.


1830년 스윙 폭동.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 농업 노동자들의 봉기


산업화는 도시·농촌할 것 없이 별의별 문제들을 발생시켰지만, 그래도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산업혁명을 향한 영국민 전반의 동경과 자부심이 존재했다. 이때는 분명 컨스터블이 아니라, 산업도시의 역동성을 그려낸 터너가 훨씬 더 추앙받는 화가였다. 컨스터블은 비교적 조용히 생을 마감한 데 비해, 터너는 화려한 국가장 끝에 세인트폴 대성당에 안치된 것만으로도 두 화가의 인기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전세가 역전된 시점은 대략 1870년대부터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하면서 역으로 시골과 전원에 대한 향수가 증폭되었다. 이때부터 영국 문화 저변에서 시골을 찬양하는 기조가 확산되더니, 시골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이상적인 영국의 아름다움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우리 전원이 참 아름다웠지"와 같은 회상이 아닌 "전원적 잉글랜드가 진짜 잉글랜드!"라는 현실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럼 온 도시를 가득 채운 저 검은 공장들은? 영국적인 것의 돌연변이일 뿐이었다.


이와 동시에 컨스터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의 작품 속 평화로운 시골 경치는 영국인들이 '진짜 영국'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건초수레>였다. 고요한 강가에 소박한 오두막, 울창한 나무와 푸른 들판. 작품이 연출하는 꿈 같은 분위기는 조국을 향한 애국심까지 끓어오르게 했다. 세기 말부터 이 작품은 거의 국보급 대우를 받는 예술품이 되었다.


<건초수레>(The Hay Wain, 1821)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시골예찬'은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더욱 깊어졌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일상이 파괴되고 불안이 증가할수록 사람들은 불변하는 이상적 시골 정경에 의지했다. 그것으로부터 나의 가정과 국가가 안전할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었다. 더 나아가 그 풍경은 심리적 위안을 주는 장치를 넘어, 정말로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할 '현실'이었다. 실제로 영국인들은 그러한 결의로 전쟁에 임했고, 머나먼 전쟁터에서 나른하고 푸르른 들판을 떠올리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이들의 인식 속에, 나치 독일은 차갑고 삭막하고 무력적인 산업사회라면, 영국은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시대에 뒤쳐진 시골사회였다.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더 극적으로,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자연 풍광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잃어버린 시골 정취를 향한 향수와 애착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컸다. 그 마음이 현실 부정에 가까운 '전원적 영국'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영국인들에게 강력한 공명을 일으켰다. 그때 재발견한 컨스터블의 작품은 그들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지나간 것의 아름다움. 그에 대한 강한 그리움. 작품과 관객의 완벽한 정서적 일체감은 컨스터블을 영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최고의 화가로 만들어주었다.



과거를 안고, 미래를 향해


나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다. 앞으로 경험할 기회가 있는 미래보다, 실체로 살아보았고 다시 만날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과거가 좀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과거를 차마 보내지 못하는 컨스터블과 그 시대 영국인들의 마음에 사뭇 공감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으니, 시간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공간이라도 붙잡아, 그것만큼은 흘러가지 않기를 그들은 바랐던 것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 답답한 마음도 있다. 어디를 가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 풍경만 그리고, 고향 여자를 만나, 일평생 외국에도 나가지 않은 컨스터블의 삶은 너무 고지식하다. 최초의 산업국 영국이 도리어 주변국들을 '산업국'으로 깎아내리면서 전원적 환상에 젖어있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또한 그들의 위치에 나를 대입해보면 다시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나도 어느 때는 너무나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앞날의 시간과, 그와 함께 소멸하는 것들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마냥 과거에 묻혀있지 않았다. 과거의 소중한 추억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컨스터블에게 고향은 화가로서 필요한 영감 그 자체였고, 눈앞의 불안을 딛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안정제와 같았다. 녹색 영국이 진짜 영국이라 주장하던 영국인들은 정말로 그 녹색을 보존하기 위한 사회운동에 착수했다. 녹지보존 운동, 유적지 보호 운동, 고건물복구 운동 등은 모두 19세기 말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덕분에 현재 영국은 그들의 역사와 자연을 가장 잘 보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 역시, 과거가 주는 힘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정도만큼은 과거를 그리워하겠다고. 때로는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 내 발목을 잡는다. 스물 일곱 즈음. 역사학 공부를 시작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할머니가 아파서인지 자주 과거를 돌아보았다. 과거가 주는 의미가 큰 만큼, 과거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현실 앞에 겁을 먹었고,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미리 슬퍼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당연한 순리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내 마음은 계속 방황했다.


그러다 찾은 유일한 해결책은 "과거를 안고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뿐이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과거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듯, 오늘은 미래의 내가 그리워할 과거가 될 것이기에, 더 행복하게 그리워할 과거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의지를 다졌다. 소중한 것들의 소멸은 막을 수 없지만, 소멸했다고 해서 아무 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나는 길을 잃었을 때 날 구해줄 할머니만 기다리면 되는 꼬맹이는 아니지만, 그때의 기억은 나를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조금은 덜 두려워할 줄 아는 어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나의 유년시절은 지나갔고, 그 동네는 변했고, 언젠가 할머니도 떠나보내겠지만, 그 과거는 지금의 나로,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힘으로 오늘도 충실히 살아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과거들에 끊임없는 의미부여를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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