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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별 Jun 16. 2024

술에 취한 밤

오래전 그날

<술에 취한 밤>

언제였더라, 8년 전이었을까? 아니면 아마도 9년 전?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그와 둘이서 투다리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는 1년 정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시기였다. 안주와 소주가 테이블 위에 차려질 때에도 둘 다 별 말이 없었다.


나는 술이 약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런데 그날은 소주 딱 한 잔만에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정말 딱 한 잔을 마셨는데. 그 뒤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주사는 아니지만 술을 마실 때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아주,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 만약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거나 기분이 너무 울적하고 슬플 때 술을 마신다면 조금만 마셔도 금세 취해버리고, 기분이 조금 업되었다거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 소주 두 병 반까지는 알딸딸한 정도다. 나도 참 신기한 게, 아무튼 그렇다.


그날은 너무너무 슬펐다. 가족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와의 관계도 미적지근했다. 우리가 집 앞 투다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걸 안 아빠가 남동생과 같이 나를 데리러 투다리에 왔다.


아빠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사이가 나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아빠가 굉장히 힘들었다.


 서른이 다 된 내가 자정이 넘어서 애인이랑 집 앞에서 술 좀 마시겠다는데 아빠가 남동생과 쫓아 나왔다는 게 너무 창피하고 슬펐다. 그즈음 며칠 전부터 부모님과의 사이가 악화일로였기에 더더욱 아빠에게 반항을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이나 되어서 무슨 사춘기 소녀 같은 심리였는지 모르겠다.


그날 나는 아빠를 따라가지 않았고, 아빠는 묵묵부답으로 고집을 부리고 앉아 있는 나를 할 수 없이 두고 다시 남동생과 집으로 돌아갔고, 전 애인은 그걸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너무 슬퍼졌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애인의 원룸이었다. 정신이 번뜩 들어 착의 상태를 확인했다. 애인은 벌써 깨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지?"라고 내가 그에게 물었고, 애인이 "응."이라고 답하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얼굴을 묻고 토했다. 애인의 한숨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이어 "소주 한 잔 마시고 취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며 그가 내게 약간 서글픈 표정인 듯 황당한 표정인듯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난 독립해서 혼자 산다. 그와는 완전히 헤어졌는데, 내 직장이 분원을 내서 나도 2년 6개월 전에 그곳으로 옮겨갔고 바로 옆옆 건물에서 그도 일하고 있었다. 출퇴근할 때, 직장 앞 컴포즈 카페에서 커피를 사려고 기다릴 때 그와 자주 마주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알은체를 하지는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일이 끝나고 걸어가는데,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걷는 쌍둥이들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빠와는 여전히 사이가 안 좋지만, 우리는 예전처럼 그렇게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우지는 않는다. 대신 조금 더 우아해졌다고, 고상해졌다고 해야 할까.


나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하다. 하지만 같이 있어서 슬프고 아픈 것보다 혼자 외롭고 쓸쓸한 편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매일 생각한다.


술은 그냥 집에서 종종 혼자 맥주 한 캔이나 소주 반 병정도만 홀짝인다. 외롭지만 행복하다. 혼자서는 아직까지 취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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