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보리차를 한 잔 따라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운 걸 잘 먹지 못하기 때문에 보리차가 약간 식을 때까지 10~20분 정도 기다린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참 신기하다고 느끼는 게, 보리차가 식는 동안 기화가 일어났다는 게 확연히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에 머그 한가득 따랐던 보리차는 몇 분 정도 지나면 한 두 모금은 마신 것처럼 줄어들어 있다. 액체가 기체가 되어 증발해 버리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건 이미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도 배우는 작용이지만, 나는 이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왜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매번 겪을 때마다 이렇게 신기할까 의문이지만 말이다.
6월이 벌써 다 가고, 올해도 반이나 지나갔다는 사실이 마치 머그에 담긴 따뜻한 보리차가 기화되어 줄어들어버린 것처럼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분명히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어느새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이.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모래처럼 시간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매해 겪으면서도 기묘하다.
기화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몇 년 전에 읽었던 김현 시인의 '기화'라는 시가 생각난다. "보리차는 식어가고 나는 영혼을 앞에 두고 있다"라는 마지막 연이 인상적이었던. 그 시의 배경은 겨울이었지만, 오늘은 6월의 마지막 밤이다. 나는 기화되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이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