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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Sep 27. 2024

(17) '대가리를 깨끗하게' 하는 법

삼성 고덕 숙식 노가다 연재

안녕하세요. 굉장히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전세계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 팀장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9월부로 팀을 마무리하고 당분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친한 룸메이트도 한 달 전에 숙소 문제로 그만두었습니다. 순간 ‘내가 아무리 오래 있었어도 딱 이때까지 일했겠구나 ‘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가다라는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일단 겉모습만 봐도 닳고 닳은 안전모에 후줄근한 안전벨트와 복장, 지저분한 안전화, 거기에 주변 공기마저 변화시키는 땀내까지, 깔끔한 복장으로 일하는 서비스나 전문직과 상당히 비교됩니다. 흔히 어른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 펜 굴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환경도 거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위험한데 공장이 완성되기 전인 기둥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배관이 들쑥날쑥 있고 전선도 이리저리 얽혀있고 온갖 장비들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 보면 왜 어른들이 ’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곳‘에서 일하라고 하는지 실감합니다. 


여름과 겨울은 정말 지독합니다. 에어컨, 히터는 최후에 공조기가 설치되면서 가동합니다. 대부분 기술인들은 공조기를 설치하거나 장비가 돌아가도록 전선을 배설해야 하는 역할이기에 에어컨, 히터를 맞이하며 일하는 기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설령 가동한다 해도 장비를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설비는 아닙니다. 


여름에는 마치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덥고 진한 수증기 속을 돌아다닙니다. 겨울에는 옷을 3겹 이상 껴 입었는데도 덜덜 떨면서 아침체조를 합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서 우연히 삼성전자 본사 사람들을 봤습니다. 깔끔한 양복에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습니다. 한가롭게 웃으며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휑한 골조에서 일했는데 완성된 건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데렐라가 들어갈 법한 유리궁전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일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 열심히 할걸 ‘이라는 원초적인 후회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인 양 별 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저 또한 대학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열심히 공부할걸 하는 무의미한 후회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교하며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름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한 친구는 이전에 대기업에서 근무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정치싸움과 업무상의 부조리에 질려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이미 이 친구는 사무직으로 일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현장업무에 능숙해져 있었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너무나 추워 3, 4겹 껴입고 손난로를 쥐고 있어도 덜덜 떨렸습니다. 그 친구와 배선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니퍼로 전선 피복을 벗겨내고 가위로 양면 고무테이프 한 귀퉁이를 드러내어 빠르게 떼어냅니다. 그리고 수십 번 감아 동그란 ‘알사탕‘을 만듭니다. 그 친구는 이미 삼성 엔지니어 관계자들도 인정한 ’ 에이스’였습니다. 역시 이렇게 추운 곳에서 한두 번 작업하고는 덜덜 떨며 주머니 속 손난로를 만지며 한숨을 쉽니다. 한숨마저 하얀 입김으로 나옵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농담반 진담 반으로 그 친구를 보며 물어봅니다. 


전혀요. 절대로 갈 생각 없어요. 몸은 힘들어도 여기가 훨씬 천국이에요. 


의외의 대답에 놀랐습니다. 잠깐이라도 “역시 회사가 좋네요”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따뜻한 회사보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이곳이 훨씬 천국으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거기는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스트레스가 엄청났어요. 특히 상사하고 엮이다 보면 진짜 끔찍했어요. 거기도 돈은 많이 줬지만 하루하루 병들어 가는 게 느껴졌어요. “


퇴근시간이 되었습니다. 5번 게이트로 나가기 위해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으니 안전관리자가 5열 중대로 줄을 세웁니다. 멀리서 보면 흡사 사단급 규모입니다. 여러 가지 잡담이 들립니다. 빨리 퇴근해서 밥 먹자, 어디 길이 빠르더라, 오늘 일이 힘들었다 등등... 그러던 와중 제 뒤에서 몇몇 기술인들의 대화가 들립니다. 


형님은 여기가 좋아요?


“응 너무 좋지. 너희는 안 그러냐?”


뭐 그냥 그렇죠. 뭐가 그렇게 좋아요?


“여기는 대가리가 깨끗해 “

”너무 간단하잖아. 아침에 출근해. 오늘 너 이런 일 하고 나는 이런 일 할게. 끝. 얼마나 단순해? 대가리가 정말 깨끗해진다니까!” 


다소 거친 말투긴 했지만 굉장히 확신에 찬 어조로 동료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선 대가리가 깨끗해]


이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면서도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저 또한 이곳에서 ‘대가리가 깨끗해지는’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은 단순함, 반복이 행복을 불러온다.

미술선생이 숙식 막일을 하러 갑니다. 누가 봐도 불안하고 걱정됩니다. 붓을 잡아야 할 사람이 망치를 들 수 있을까. 자유로움을 추구해야 할 사람이 거친 환경과 규칙을 지킬 수 있을까. 


초반에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는 게 지옥 같았습니다. 출근하고도 너무나 졸려 가끔 서 있다가 졸려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녁 10시가 되면 다들 약속이나 한 것 마냥 잠드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퇴근하고 씻고 밥 먹고 스마트폰만 잠깐 들어도 10시가 훌쩍 지나갑니다. 다음날 또 5시 30분에 일어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 생활을 주 6일 반복합니다. 


반면 사회에 있을 때는 학원이라 11시 출근이었습니다. 때론 점심 이후에 출근했습니다. 한동안은 원장과 협의해서 주 4일만 출근했습니다. 자는 시간도 들쑥날쑥 이었습니다. 대부분 새벽 2시 즈음에 잠들었습니다. 어차피 다음날 부스스 일어나도 출근 시간이 여유로워 9시쯤 일어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생활은 군대보다도 더 엄격합니다.


강사였을 때는 일어날 때에도 온갖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앞으로는 잘 될까,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등등 생각으로 침대에서 수십 분을 생각이나 스마트폰을 했습니다. 일어나도 개운치 않습니다. 반면 숙식 막일은 그럴 생각하고 있을 시간에 남들보다 빨리 일어나 씻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각자 정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얼른 일어나 씻어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일어나 씻기 시작하면 잡스러운 생각들도 씻겨 나갑니다. 인생고민, 스마트폰은 사치입니다. 바로 일어나 일단 씻고 아침을 먹습니다. 또 ‘고덕 숙식 막일’ 글을 연재하려면 훨씬 더 빨리 일어나 새벽을 맞이합니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새벽은 고덕은 너무나 고요해서 글쓰기엔 최고의 장소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 대한 고민은 나중일입니다.


출근하고 나서도 쉼 없이 움직입니다. 보통 책상에 앉아 멍하니 컴퓨터를 하면 온갖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현장은 컴퓨터도 없고 모바일 데이터 신호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오직 기계들, 사람들뿐입니다. 예전엔 각자 스마트폰을 했다면 현장은 오직 사람들을 만나 서로 얼굴을 보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부터 오늘 업무, 관리자와의 마찰 등 온갖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 보다 열 배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니다 보면 비관적인 생각이 기어 나올 새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

일하는 건 어떨까요. 초반 기술인에게 기대하는 건 오직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제발 사고 치지 않고 주 6일을 꾸준히 나올 수 있는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팀장님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사회성이 밝은지 보지 않습니다. 그저 주 6일을 한 달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변명 없이 지각하지 않고 7시까지 출근할 수 있는가를 봅니다. 일도 잘하고 출근도 잘하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훨씬 좋은 회사에 있을 겁니다. 여기서 원하는 건 단순합니다. 그저 이 사람이 사고 치지 않고 꾸준히 나오는 사람인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조건을 못 지킵니다. 심지어 젊고 사회성도 밝고 일도 잘하는 친구들이 자주 아파 결근합니다. 때론 킥보드를 타다 사고 나서 그만두거나 오래 쉽니다. 경력도 많으신 형님들도 밤새 술 마시고 결근하거나 갑자기 그만둔다는 문자만 남기고 당일퇴사합니다. 결국 인원 TO만 차지하고 일은 남은 사람들이 짊어져야 합니다. 결국 꾸준히 나오는 성실함이 최우선 조건입니다. 


반면 사회에서는 다양한 능력을 기대합니다. 학원 선생인 제 시절을 생각해 봐도 수업 외에 상담, 학원 운영, 재료관리 등 다양한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외에 인원이 줄어들면 왜 줄어드는지 회의하고 마케팅은 어떻게 하고 방학특강은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등 복잡합니다. 퇴근 후에도 연락이 오고 계속해서 상담일지를 작성해야 합니다. 하는 게 많고 능력이 많을수록 기대하는 건 많아지고 결국 부담이 됩니다. 


부담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변수가 많아지고 
변수가 많아지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삶이 괴롭습니다.


현장은 반대로 돌아갑니다. 꾸준히 출근만 해도 일명 ‘에이스’ 소리를 듣습니다. 능력이나 사회성은 그다음입니다. 몸은 힘들지만 정신적 부담은 없습니다. 일도 단순해서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터넷으로 여러 글을 읽다 보면 비슷한 사례들을 발견합니다. 

https://m.humoruniv.com/board/read.html?&table=pds&number=1329081

https://m.humoruniv.com/board/read.html?table=pdswait&number=11239583&from=in&search_word=%B3%EB%B0%A1%B4%D9


이런 일상이 반복되니 어느 날 이런 생각까지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입니다. 사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부족하고 불안정하고  곱지 않은 시선의 직업이며 여전히 미래는 불투명한 한숨만 나오는 삶인데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룸메이트랑 한창 수다 떨고 내 방에 홀로 있을 때, 잠자리에 들 때 이상하게도 행복감이 밀려왔습니다. 


이전에는 분명 자기 전 괴롭고 일어날 때에도 한숨이 나오는 삶이었지만 현장에 온 뒤로는 사람들과의 웃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었고 객관적으로 나이는 먹어가고만 있고 나아진 게 없는데도 만족감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뻔한 단순하고도 규칙적인 생활, 그리고 움직임 덕분이었습니다. 20대 때에는 하루하루 즐거워야 만족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뻔하고 예측가능하고 단순한 반복생활로 머릿속의 복잡한 고민들이 사라짐을 느낍니다. 물론 돈은 계속 모아야 하고 또 결국은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하지만 그런 고민들은 계속해봤자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현재 자체에 머무르자 고민들이 사라집니다. 결국 누가 말한 대로 ‘대가리가 깨끗해’ 집니다. 

머리가 깨끗해지면 오히려 삶에 대한 기대가 생깁니다. 무엇보다 미래, 과거보다 현재를 관찰합니다. 출근하며 보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며 몸은 힘들지만 남들은 잘 때 나는 이곳에 왔다는 성취감이 피어오릅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만나는 동료들을 보면 즐겁습니다. 영양가 없는 농담만 주고받아도 만족스럽습니다. 


고덕에서 배운 한 가지 삶의 지혜 중 하나가 바로 대가리 깨끗이 하기, 즉 머리를 비우는 법입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활을 할 것

-몸을 움직일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어느 순간 현재에 집중하는 힘을 얻습니다. 지금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여전히 고민이 많아질 때마다 최대한 삶을 단순화하고 반복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누워서 스마트폰을 하던 습관을 버리고 바로 일어나 따뜻한 물을 마시고 아날로그 노트에 글을 씁니다. 이 글은 거기서 받아 적은 것입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생각이 복잡하다면 ‘대가리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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