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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Oct 20. 2021

봉준호의 <설국열차>

무의미해진 존재들의 빈곤 문화

기차 안의 사람들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생존자들로,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고철 덩어리 안의 죄수’인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다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류된다. 그중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주인공 커티스는 그 질서를 거스르고 꼬리칸부터 엔진칸까지 전진한다. 커티스의 행보에 따라 기차 전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생명력 없이 무채색만이 가득한 꼬리칸부터 생명력이 넘치고 다채로운 칸들까지, 폐쇄된 공간을 통해 강조되는 계급 간의 위계질서와 그에 따라 분리된 생활공간의 대비가 뚜렷한 만큼 문화적 차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글에서 집중하려는 부분도 ‘문화’이다. 여기서는 꼬리칸 사람들의 의식주와 관련된 대사들을 바탕으로 살펴본 꼬리칸 사람들의 일상이자 문화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산물로 존재해야 할 문화가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소유물로 변하여 사람들을 분류하고 위계질서를 공고히 함으로써 어떻게 그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시키는지에 주목한다.


꼬리칸 사람들은 기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경제적 관점에 따라 생활공간이 분리됐고, 무임승차라는 명분으로 윌포드의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걸 다 뺏긴 후, 음식도 물도 없는 철창 안에서 극도로 제한적이고 소외당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식인 풍습이라는 기형적인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에 의해 생활공간이 구분되고 그 안에서 일상이 바뀌면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됐다. 유일한 대체식량 단백질 블록, 비위생적인 잠자리, 아이들은 공을 만져 볼 수조차 없으며, 화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 스테이크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것 등등. 이것이 꼬리칸 사람들의 일상이자 문화이고 실재이다. 반면 지배계급 사람들은 스시와 각종 과일·채소·육류를 골고루 먹고, 아이들은 교육을 받으며, 여가 시간을 수영과 사우나, 치과, 미용실, 의상실, 클럽 등으로 다채롭게 보낼 수 있다. 즉 취향대로 다양한 활동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앞칸 사람들의 일상이자 실재이다.


이렇듯 꼬리칸과 그 앞 칸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대비는 처음부터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신발의 위치는 발이다. 나는 머리이고 여러분은 발이다. 모든 것에는 정해진 위치가 있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이들의 문화적 차이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인 자질에 따라 구분된 것임을 역설한다. 즉 문화란 사람들에 의한 사회적 산물이지만, 영화에서는 그것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이자 자질로서 강조되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문화적 차이가 사회계급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결국 문화가 계급에 따라 누릴 수 있고 누릴 수 없게 되는 일종의 ‘소유물’로 전락하도록 만든다.


이를 바탕으로 알 수 있는 꼬리칸 사람들의 일상은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이다. 꼬리칸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무의미로 돌아간다. 그런 무의미함 속에서 꼬리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역시 무의미한 존재로 각인시키며, 그들만의 빈곤한 문화를 형성한다. ‘무의미한 존재’라는 인식과 빈곤한 일상에 의해 빈곤해진 문화는 다시 권력으로 하여금 선천적인 자질로 규정되며 기차 전체를 지배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생산·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수단이 된다. 결국 꼬리칸 사람들은 스스로를 무기력한 존재로서 여기고, 생존을 위해선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들 모두가 생존을 위해 기차라는 공간에 갇힌 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임에도 경제적 관점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한정된 산물에 따라 균형을 위한다며 피지배계급을 무의미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 나아가 피지배계급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무의미한 존재로 내면화하는 것 역시 폐쇄된 공간 속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문화이자 구조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서 커티스와 남궁민수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커티스는 꼬리칸이라는 폐쇄된 공간 내에서 꼬리칸 사람들의 무의미한 일상을 깨는 균열을 가져오는 인물로, 남궁민수는 그 기차라는 무의미한 구조를 유지하려는 본질적인 환경 자체에 균열을 가져오는 인물로 해석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영화는 좁게는 꼬리칸, 크게는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무의미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빈민 집단의 문화, 그리고 고급과 저급을 나누는 계급 문화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주축이 되어 일으키는 균열을 보여줬다. 이로써 <설국 열차>는 영화가 드러내는 사회구조 중 한 축으로 ‘문화란 선천적 자질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산물’ 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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