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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Oct 06. 2021

변증법적 사유, 선택이 아닌 존재의 이유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 그리고 나의 '다큐멘터리적 지식인'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일반적으로 중간 계급에서 태어나 지배 계급의 특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은 자’로서 이들만의 계급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문제점은 당초 지식인은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 프티부르주아여야 하지만, 지배 이데올로기의 특수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프티부르주아였던 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식인이 부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란 ‘태생적으로 지배계급에 의해 선택되어 교육받았기에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야 한다’와 ‘현실을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가 지식인의 부재를 막고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이다. 이때 그 노력의 일환으로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관점을 전복하고 그 속에서 ‘내화된 외성의 순간과 내성의 재외화의 순간’을 연결하는 것 즉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지식인이 계급적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요구와 보편화를 위한 자신의 싸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요구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사유가 가능하려면,  ‘상황 속에 놓인 존재라는 의식 갖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르트르가 말하길, 그러한 의식은 지식인을 만들어낸 모순이 지식인으로 하여금 보편적인 방법(역사적 방법, 구조에 대한 분석, 변증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특이성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며, 또 프롤레타리아의 특수성,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구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간직하게 되는 특수성 속에서 보편화의 노력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요구에 입각하여 특수한 것을 파악할 때, 보편적인 것을 보편화를 향한 특이성의 운동으로 환원할 때, 자기를 구성하는 자기의 모순을 의식한 지식인은 비로소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자각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르트르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이 글은 이제 ‘(모든 사람이란 존재는) 상황 속에 놓인 존재이다’를 핵심 테제로 두고, 오늘날에 필요한 지식인 유형을 정의하겠다. ‘상황 속에 놓인 존재’라는 의식은 지식인 역시 항상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존재, 달리 말해 ‘어느 한 사회구조에 속한 한 명의 행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이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헤엄치며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을’ 보편성을 계속해서 쫓아야 한다.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가정, 학교, 직장, 국가 등의 다양한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을 축적해가고 있다. 그렇게 습득된 지식은 개개인의 유익과 합리성에 따라 선택과 행위를 결정지으며, 고유한 보편이자 정당한 것, 일상이자 현실, 더 나아가 사회적 실제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문제는 ‘지배계급의 권력 개입’이다. 권력에 의한 문화와 제도라는 사회 구조가 먼저 만들어진 후 개개인이 습득해야 할 지식이 분배되고, 거기서 유익과 합리성이 결정되어 개개인의 선택과 행위까지 결정지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말한 변증법적 사유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끊임없이 관점을 전복하는 것은 내면의 나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속의 나, 오늘날 시공간 속에 놓인 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의 사유와 행동의 근거가 되는 경험의 지식이 권력의 개입으로 인한 구조로부터 쌓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특히 지식인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며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사회구조 속 문제들에 대해 본질적인 접근하는 첫 단추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는 특정 시공간과 특정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즉 시대가 변했다고 지식인이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기가 더 수월해진다거나, 혹은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얼마 큼의 권력을 점하고 있든, 얼마나 똑똑하든 그 조건이 뭐든 간에, 지식인은 사회구조에 맞서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계급적 특수성에 굴복하지도 말고, 자신의 모순을 분명히 인식하여 특수한 것의 보편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투쟁과도 같은 사유의 과정을 사르트르가 이 텍스트를 썼을 당시의 지식인부터 오늘날의 지식인, 더 나아가 후대의 지식인까지 그 모두가 거쳐야만 한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그의 견해가 통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상황 속에 놓인 존재라는 의식’과 ‘내화된 외성의 순간과 내성의 재외화의 순간’의 연결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documentary)적 지식인’이 되길 요구한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적 지식인’이란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역할과 동일한 역할을 다하는 지식인으로, 사회에 대한 대중의 참여적 성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창의적이고 다양한 형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을 말한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사에 최초로 ‘document’라는 용어를 도입하기 시작한 존 그리어슨의 글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사실을 기록하기’라는 의미가 강조되었다. 더 나아가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를 단순한 ‘사실에 대한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만족을 주는 한편 명확하게 정의된 사회적 목적을 지닌 ‘현실성의 창조적 가공’이라고 말하며 다큐멘터리의 의미를 확장했다. 즉 현실이라는 자료를 편집하고 영화의 구조로 재배열함으로써 현실에 해석을 가하는 것으로, 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 사실에 대한 제작자의 의도와 창조적인 행위까지 허용하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새로운 창작물’로서 다큐멘터리를 보게 하는 새로운 길이 열리자, 다큐멘터리가 갖는 객관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보통 객관이라고 하면 보편타당함을 전제로 하는데, 이때 ‘다큐멘터리에서 객관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카메라가 절대적 객관을 담아내기란 가능한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이 객관인가’에 대한 물음을 생각해보자. 이 물음들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분명한 답을 찾기가 모호해지고, 이에 따라 다큐멘터리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 또한 무색해졌다. 이렇듯 다큐멘터리는 ‘객관을 전제로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있으면서 동시에 ‘다큐멘터리에 반영된 현실이 과연 어디까지가 객관적이냐’라는 문제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갖는 이러한 모순은 ‘왜곡된, 객관적이지 못하다’등의 평가와 함께 다큐멘터리 감독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갖는 의미가 상당히 복합적이므로, 다큐멘터리는 태생적으로 절대적인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평가들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숙제로, 이들은 다큐멘터리가 갖는 모순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의 재구성과 객관적인 현실 반영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감독들은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체 왜’, ‘대체 무엇이’, ‘대체 누가’, ‘대체 어떻게’ 등의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집중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 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회를 비판하고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며, 다큐멘터리에서 재구성한 현실세계로 관객을 끌어 들어야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의 끝에는 관객에게 ‘참여적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 다시 말해 관객을 다큐멘터리 속에 나타난 사회의 단면을 단순히 관찰하는 관찰자에서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주제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는 참여자로 전환시켜야 한다. 지속적으로 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실천적 행동이나 사유의 방식으로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가 지닌 사회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바로 이 점이 다큐멘터리적 지식인이 갖춰야 할 능력이다.


정리하자면 다큐멘터리적 지식인이란 위와 같은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지식인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철한 관점과 변증법적 사유를 토대로 대중이 스스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보다 거시적으로 사회문제를 생각해보고 싶게끔 참여적이고 실천적인 정신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이때 지식인의 행보는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에 속한 하나의 새로운 창작물로서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목소리’라는 평가보다는 대중에게 ‘그 목소리가 등장한 이유와 그것이 가져오는 변화, 그 속에 반영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는 숙제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하여 지식인의 행보가 대중에게 참여자로 변화할 수 있는 장(場)이 되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인은 대중이 스스로 삶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과연 단번에 정의 내릴 수 있는 문제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고민하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문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대중은 개인의 행동양식부터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습관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자동화를 중지하고 의문을 던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노력을 통해 변증법적 사유를 연습 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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