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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enity Oct 18. 2021

여권사진과 보정어플

#the record of vanity

얼마 전 여권 재발급을 위해 여권사진을 다시 찍으러 사진관에 갔다. 증명사진이든 여권사진이든 사진관에서 찍은 보정되지 않은 사진에 기대 같은 건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하지만 최대한 꾸미고 갔다.


사진관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집에서 걸어오는 짧은 시간에도 땀이 났는지 벌써 머리가 축 가라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거울을 보다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사진작가님의 지시에 따라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이다 보니 순식간에 끝이 났다. 긴장해서 숨을 참고 있었는지 끝났다는 소리에 깊은 한 숨이 나오는데, 벌써 끝났다는 게 아쉽기도 하고, 더 찍는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보정과 인화를 하는데 20분이면 된다고 하셔서, 잠깐 앉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정사진을 확인하라며 컴퓨터 쪽으로 부르셨다. 우선, 보정된 사진을 먼저 보여주시고는 원본사진을 순식간에 '휘리릭' 넘기시며, 별로 보정을 안 했다고 얼버무리셨다. 원본을 다시 보여달라고 하니 별로 안 바꿨으니 괜찮다고 하시며 끝까지 보여주시지 않았는데, 딱히 위로가 되는 거 같진 않았다. 그래도 어떤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상처가 되지도 않았다.


다시 사진이 인화되길 잠시 기다리는데, 작가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셨다. 요즘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 학생 중에 여권사진이나 증명사진을 찍으러 와서는 '보정되지 않은 원본'을 보여주면 충격을 받아하거나, 심지어 작가님이 사진을 못 찍는 거라며 화를 내거나 부정하며 우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한 학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100방 이상을 다시 찍었지만, 마지막까지 작가님 탓을 하며 그냥 뛰쳐나갔다고 한다.


작가님 말로는 그렇다. 20대 후반 또는 30대 이상은 보정되지 않는 필름 카메라나 일반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보정되지 않은 본인의 사진을 보았을 때, (물론 살짝 타격은 있을 수 있으나) 큰 괴리를 느끼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보정어플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보정된 사진'을 '실제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여 마치 민낯과 같은 여권사진이나 증명사진 원본에 찍힌 진짜 모습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게 단순한 일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친구들과 사진을 찍을 때 이제는 보정어플이 아니면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여권사진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 보정어플로 찍은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다는 것인데, 평소 일반 카메라 어플을 피하는 태도는 '보정된 모습'과 '나'를 일치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근데 우리 세대가 이 정도인데, 일반 카메라로 본인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지금 세대들은 얼마나 그 경계가 흐릿할 까 싶었다. 그리고 과연 보정 어플이 현대인들에게 특히, 10대, 20대들의 정체성이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해졌다.


구글 검색을 통해 몇 개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해외에서는 이미 관련된 연구가 꽤 있는 것 같았다. 공통적인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셀카를 찍는 행위 자체가 자존감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어떤 친구들은 외모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록하고 공유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보정을 하는 것은 자존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자신을 대상화하여 상품처럼 보는 경향이 강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청소년들에게는 특히 더 위협적인데, 보정된 모습을 지나치게 내면화하는 강박이 심해지면 신체이형증 (body dysmorphic disorder) 같은 망상장애나 섭식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지금 세대 아이들 중에 일부는 보정에서 벗어난 진짜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도 점점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보정어플이 과연 자신에게 정말 이로운 것인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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