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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 리뷰: 간절함과 끈질김으로 버텨낸 생명

by NoZam

최근 박경리 작가님의 대하소설 《토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에 앞서 조정래 작가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을 1년여에 걸쳐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조정래 작가 책의 주요 배경은 전라도이고, 《토지》는 경상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두 지역을 배경으로 당대의 아픔을 그려낸 두 거장의 작품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두 분의 작품을 통해 그 시대를 여행하고 나니, 유독 《토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한탄이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만 하늘과 땅이 딱 붙어 버렸으면 좋겠다."


이 문장이야말로, 그 암울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모든 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간절함'이라는 이름의 대서사시

만약 누군가 제게 이 방대한 소설을 한 단어로 정의해달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간절함'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토지》는 거대한 간절함의 이야기입니다.

최씨 문중의 몰락을 막고 대를 잇기 위한 최서희의 고군분투, 신분마저 바꾸는 운명적 선택을 해야 했던 그녀와 김길상의 삶은 처절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비단 주인공뿐만이 아닙니다. 서희의 몸종이었던 봉순이부터 용이, 월선이, 임이네, 강포수 같은 수많은 주변 인물들의 삶 역시 살아남기 위한 간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개인의 간절함은 마침내 나라의 독립을 향한 거대한 염원으로 합쳐집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만난 이야기

사실 《토지》는 20대 시절, 대여섯 번은 읽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참 희한하게도 그 마지막 장면이 기억나지 않았거든요. 이번에는 오디오북으로 다시 만났는데, 성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몰입감을 경험하며 비로소 그 마지막 장면을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여정에서는 유독 인간의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준 장면들이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끔찍한 이기심을 보여준 임이네의 죽음, 마지막 순간까지 악독했던 조준구의 최후, 그리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랑마저 붙잡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아야 했던 이상현 같은 지식인의 고뇌가 그것입니다.


《토지》를 관통하는 세 개의 키워드: 간절함, 끈질김, 생명

이 거대한 서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기에, 저는 세 가지 키워드를 나침반 삼아 이 이야기를 읽어냈습니다. 바로 '간절함', '끈질김', 그리고 '생명'입니다.

첫째, 간절함은 인물들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입니다. 둘째, 끈질김은 모든 것을 빼앗긴 상황 속에서도 결국 버텨낸 우리 민초들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생명은 소설 후반부를 채우는 새로운 세대들을 통해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이어지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결국 《토지》는 이 세 키워드를 관통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생명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암울한 시대와 '외곬' 작가의 집념

소설의 배경 탓인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짓누르는 '암울함'을 느꼈습니다. 온갖 뒤틀린 인간 군상이 등장하고 인물들은 끝없는 고난에 부딪힙니다. 물론 이야기의 마지막은 '독립'이라는 통쾌한 결말이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기에 오히려 더 깊고 긴 여운이 남습니다.

몇 년 전 방문했던 박경리 문학관에서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25년이라는,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시간을 오직 한 작품에 바친 작가. 저는 감히 그를 '지독한 외곬수'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 지독한 집념과 끈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위대한 세계를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뿌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저는 이 책을 2000년생인 제 딸에게,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픔의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든 한 번은 이 역사적 비극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고민해야만 합니다.

《토지》를 읽는 것은 긴 여행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지, 그 뿌리를 알고 싶은 모든 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https://youtu.be/u3-cCrh2N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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