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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Aug 16. 2023

두 개의 <세상의 근원>

        구스타브 쿠르베, 크리스틴 오르방의 <세상의 근원>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이나 화가의 작업실(L’Atelier du peintre) 같은 대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더 인정받고 있는 듯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의 그림이 꽤 많았고 (모두 14점이다), 작품 크기가 상당한 대작들이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주 넓은 공간을, 그것도 중앙에 쿠르베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르세미술관 특별전 <Degas à l'Opéra 오페라에서의 드가>에 모든 관람객의 관심이 쏠려 있던 11월의 어느 날, 작은 방 구석진 벽에서 크지 않은 이 그림을 드디어 만났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며 내가 가장 기대했던 일은 사실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L'origine du monde>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쿠르베의 이 그림을 내가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꽤 충격이 컸었던 기억이 난다. 동명 소설인 크리스틴 오르방의 <세상의 근원>에 이 그림이 등장하지만 쿠르베나 휘슬러 같은 실존했던 화가들도 실명으로 나오기 때문에 가상의 작품인지 현존하는 작품인지도 사실 나는 몰랐다. 

 2001년 [열린책들]이 낸 소설책 <세상의 근원>의 책장을 넘기면 앙드레 마송의 <에로틱한 대지(Terre rotique)>라는 다소 외설적이고 직설적인 펜화가 있고 (제임스 애벗 맥네일 휘슬러의 <백의의 소녀>가 맨먼저 등장한다) 자크 라캉이 구입한 <세상의 근원>을 가리기 위해 부탁했던 그림이라는 설명이 들어 있었다. 이 설명조차도 소설적 장치의 하나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가졌을 만큼 작가는 허구와 현실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오르세미술관 공식 사이트는 이 작품을,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이 소장하다가 1995년 오르세를 만나기 전까지는 "실제로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유명한 작품"이라는 모순의 전형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음 장을 넘기면, 와우. 그 충격이라니.

 당시 청소년기였던 아들들이 혹시라도 포르노로 여길지 모른다는 노파심에서, 그림이 든 페이지를 셀로판테이프로 붙이고 겉표지까지 거꾸로 입혀 서가에 꽂아두었었다. (우측 하단, 셀로판테이프를 둥글게 말아 붙인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다.^^) 

                                크리스틴 오르방의 소설 <세상의 근원> 중에서.  -열린책들, 2001년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오르세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캡쳐.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L'origine du monde>은 1866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실존하는 작품이다. 책을 만들면서 이 그림을 겉표지로는 차마 쓰지 못하고 (표지는 액자만 실었다) 속지로 넣을 수밖에 없었던 편집자의 고민이 엿보인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오르세미술관의 작품 해설을 옮겨본다.  

 <세상의 근원>은 이제는 자주 전시되며 현대미술사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관음증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The Origin of the World, now openly displayed, has taken its proper place in the history of modern painting.  But it still raises the troubling question of voyeurism.) 


 지금은 아마 절판되었을 이 책이 내 수중에 있었고, 내내 작품 속 그림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게 그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갤러리에서 조용히 사진을 찍었으나, 소매치기도 직업의 하나라는 파리답게 다음날 휴대폰을 소매치기 당했으므로 사진은 지금 내게 남아 있지 않다.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그렇게 보이는), 그리고 마치 사진처럼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지 좀 막막했다. 


 여성 성기를 해부학적으로 똑같게 묘사하려는 작가들의 (미술적인) 욕구는 결코 줄어들 수가 없었다. 쿠르베는 이 매혹적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솔직하고 대담했다. 훌륭한 기교와 앰버 컬러(호박색?)의 정교한 설계에 힘입어 마침내 포르노그래피라는 오명을 벗어나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매혹적인 얼굴을 없애고 팔과 다리도 없애 그 몸통만을 그대로 담고" 싶었던 소설 속 쿠르베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한발 앞서 있지만 미술에서는 어느 누구도 아직 거기에 도달한 적이 없고 플로베르도 그런 완벽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차없이 자기 원고를 과감히 삭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자신은 펜의 정확성을 갖고 단어만큼 정확한 색깔을 통해 목표를 이루어낼 것이라고.  

 이처럼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그림을 변호하는 사람이 소설가(크리스틴 오르방)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휘슬러의 연인이었으며 쿠르베의 연인이기도 했던 조안나 히퍼넌의 시각으로 그려진 소설 세상의 근원, 그리고 소설에 구현된 쿠르베의 예술관(실은 오르방의 세계관)에 그래서 매료되었었다.  

 위험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 화형도 겁없이, 성냥처럼 온몸을 불사르고 싶었던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세월이 흘러 파리에서 나는 세상의 근원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근원을 생각한다. 내 삶은 위험을 무릅쓰던, 아니 무릅쓰려고 노력하던 위험모드에서 안전모드로 접어든 지 오래. 여성의 성기에서 세상의 근원이란 메타포를 읽어내던 그때의 나는 이제 없다. 


 돌아오는 길에 솔페리노 다리를 건넜다. 변하지 않겠다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굳은 약속을 잠근 자물쇠들의 무게가 힘겨운 다리. 자물쇠를 사라고 내게 말을 건 검은 얼굴의 청년에게 나는 자물쇠에 흥미가 없어요, 라고 말했다. 대신 가을 양광 속 말라가는 나뭇잎들이 어수선하게 매달린 미루나무를 보았다.

 강으로 뛰어내리려는 사람이 이 다리에 가장 많다고, 나는 <불란서약국>에 썼었다. 소설을 쓰던, 그런 나도 이제는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할 變은 실絲 두 개가 말을 감싸고 있다. 채찍을 가하면서.

 말(言)을 얽매면 변하지 않을 수 있던가.

 말을 가두지 않아 변했을까.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던 시간이 지나면 깊은 내(川)에는 부유물이 가라앉고 오니(汚泥)가 바닥에 깔린다. 마침내 상부에 뜬 맑은 물을 길어 마신다. 나는 그해 예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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