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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김밥 Jul 14. 2024

아버지가 남긴 글과 가방

(고덕에서의 인생 후반 #6)

아버지는 방송작가였다.


1969년 신춘 문예에 '갈색 머리카락'이라는 희곡으로 당선되며 등단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갈색 머리카락'은 연극으로 공연되고 MBC 베스트셀러극장으로도 방영됐다. 아버지는 두 동생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순수 문학 대신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방송작가의 길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쓴 코미디 프로그램을 세 가족이 함께 보는 건 행복했다. <웃으면 복이 와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때면, 어느 코너가 아버지가 쓴 건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니터링했던 기억이 난다. <웃으면 복이 와요> 집필은 아버지가 연출가 선생님을 따라 방송사를 옮기면서 끝났다. 아래 글에서 아버지 이름이 보인다.

"1969년 MBC TV가 개국하면서 시작한 <웃으면 복이 와요>가 TV 코미디의 원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략) MBC가 1973년, 김경태 PD와 작가 김일태, 김종달, 이상민이 서영춘, 송해, 배일집, 배연정 등과 함께 라이벌 방송사인 TBC TV로 옮겨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버지는 좁은 안방을 왔다 갔다 걸으며 글을 썼고, 어머니와 나는 밖에서 조용히 있어야 했다. 방송 대본 아이디어를 작은 노트에 빼곡하게 적었다. 지금도 빠르게 흘려 쓴 아버지 특유의 글씨체가 기억난다. 집에서는 일절 술을 하지 않았지만, 작가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 술을 드셨고 밤늦게 귀가하곤 했다. 아버지는 온화한 성품에 선비 같은 풍모를 가지셨는데, 친구분은 아래와 같이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작품보다 작품외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깊이 새겨져 있다.
방송작가 중에 저토록 맑고 참된 사람이 있었다니,
내가 감히 장담하건대 두 번 다시 그런 인품을 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따뜻한 외모에 밝은 눈빛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라고는 없다."


아버지는 진짜 문학을 하지 못한 것과 책을 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던 모양이다. 책을 낸 친구분을 부러워했다는 아버지의 글도 찾을 수 있었다.

"강 선생님이 문제의 쇼핑백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안의 물건을 꺼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속엔 강 선생님의 두 종류의 극본집과 산문집이 각각 두 권씩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강 선생님은 그 저서들을 박 선생님에게는 물론이고 저에게도 주셨습니다.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있는 저는 그저 부러움의 시선으로 그분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수북이 쌓여 있던 대본들은 부끄러워 폐지로 대부분을 없앴다고 한다.

"이런 결 놔둬야 하는 까닭이 없다 싶어 거의 모든 대본을 과감히 재활용폐지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인생 마지막 20년을 고덕에서 지냈다.


방송 작가로서 활동이 줄어들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결혼하여 분가하자, 부모님은 서울 동쪽 끝에 있는 고덕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부모님의 살림살이는 언제나 단출했고 정결했다. 지나치게 검소했다. 두부나 불가리스 같은 생필품을 사러 고덕 이마트까지 걸어 다녔고, 아파트 상가 내 신한은행이나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를 이용했다. 매일 도서관에 들러 신문도 보고 친구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았다.


수지나 분당에 살던 아들네를 찾아가려면 지하철을 두세 번 갈아타고 힘들게 가야 했다. 아버지는 4층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기 시작하자 아들네와 가까운 분당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재개발을 기대하며 이사에 반대했고, 나는 "분당으로 옮기세요.…"라는 미적지근한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재건축이 통과되고 이주가 임박했을 때,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내와 해외여행을 가느라, 두 손주를 일주일 정도 부모님 집에 맡긴 적이 있다. 아버지는 손주 둘을 가까운 버스 차고지에 데리고 가서 줄 지어 서있는 버스들을 재밌게 구경했다. 그 추억의 버스 종점 터는 지금 서울 시민대학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명절 때면 고덕 본가에서 차례를 지내고 점심에 먹을 것을 싸들고 하남 조정경기장으로 가서 손주들과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를 타거나 공 놀이를 한 뒤에 쭈쭈바를 열심히 먹고 있던 손주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글을 방송작가협회 달력에 남기셨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제 손자 녀석들입니다. 두 녀석은 끊임없이 장난치고 끊임없이 싸우고, 형제라기보다는 친구처럼 잘 어울립니다. 네 살 터울이지만요. 저는 이 아이들의 모습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술자리를 자주 갖는 친구가 어느 날 자기 동생을 데리고 나와 합석을 하게 됐습니다. 술 한잔 하면서 가만히 지켜보니 이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서로 못할 말이 없는, 바로 술친구였습니다.
제게는 두 아우가 있지만, 우리 형제들은 이런 분위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탓인지 저는 사춘기 시절부터 괜히 노숙한 체했고, 동생들 앞에서 점잔을 떨었습니다. 자연히 저를 어려워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요. 나이 먹으면서 동생들과 친구처럼 가까워지려고 해 봤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형제간에도 세대 간격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두 손자 녀석이 그런 '간격'만큼은 물려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부모를 일찍 여읜 탓에 학업을 중단하고 한 집안의 책임감이 강한 가장이 되었다. 그 무게 때문일까, '괜히 노숙한 체했고', '동생들과 친구처럼 가까워지려고 해 봤지만' 거리감을 좁히진 못했다고 글에 썼다. 고덕으로 이사 온 뒤로 아버지는 친구 작가분과 만나는 일도 줄인 듯하다. 아마 술값도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고덕에서 아버지가 많이 외로웠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큰손주가 고덕 주공아파트가 폭파되는 장면을 군대에서 영상으로 보았다고 한다. 나는 고덕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 낡은 고덕 아파트는 쇠약해진 아버지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고덕 본가를 방문하는 일이 없어졌고, 모르는 사이에 고덕 지역은 천지개벽을 했다. 고층 아파트들로 스카이라인이 바뀌었고, 고덕 쪽 한강에는 33번째 대교가 만들어지고 있다.


나와 아내는 올해 2월에 고덕으로 이사 왔다. 아버지가 생활하셨던 아련한 추억의 동네에서 내가 아버지와 비슷한 일상을 보낸다. 아버지는 불편하게 지냈는데 나만 많은 걸 누리며 편하게 지내는 게 죄송스럽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며 더 가깝게 지낼 것을.…" 하는 후회가 이제야 밀려온다. 고덕에서 지내다 보면 아버지 생각에 가슴 한편이 쓰리고 아려올 때가 있다.



아버지가 들고 다녔던 가방을 그대로 내가 들고 다닌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검은색 작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책 한두 권과 노트를 넣고 다니기에 딱 맞다. 가볍고 초라한 모양새지만, 퇴직 전 출근할 때도 들고 다녔고, 은퇴한 지금도 도서관이나 카페에 갈 때는 책을 넣어 들고 다닌다. 회사에서 가끔 보는 동료는 내 가방을 보고, "아직도 들고 다니시네요~" 하며 인상 깊어했다. 은퇴 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가방을 들고 가면, "이게 뭐냐, 왜 아직도 책가방을 들고 다녀?"라며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도 나는 가방을 잘 들고 다닌다.


가방 손잡이를 쥐는 느낌도 좋다. 작고 초라한 가방을 든 내 손이 부끄럽지 않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인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방 손잡이를 끝까지 놓고 싶지 않다. 아직도 아버지를 의지하고 싶고, 소박한 아버지의 인품을 닮고 싶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남긴 것 중에는 오래된 잡지 '학원'이나 문예지 '현대문학'이 있고, 박완서 작가님이나 법정 스님의 책들도 있다. 칠순을 넘어선 아버지는 '죽음'을 공부하는 독서 모임에도 참가했고, 죽음을 주제로 한 책들도 꽤 남겼다. 그중에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법정 스님의 책이 있는데, 밑줄 그어진 문장들에서 아버지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나도 죽음을 공부할지 궁금하다.




글을 쓰셨던 아버지가 늘 자랑스러웠다. 누군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어올 때면,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방송작가라고 답했다. 이제 나는 은퇴하여 아버지가 살던 동네로 이사 왔고, 집 근처에 있는 서울시민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좋은 문장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아버지가 일상을 보냈던 이 동네, 글쓰기, 그리고 가방, 이런 것들이 나를 아버지와 연결 지어 준다.


"아버지, 사랑하고, 보고 싶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 귓속말로 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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