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도 않으면서, 참을성도 없으면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긴 시간, 꽤 긴 시간 동안. 열심히 노력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질문했지요. 네가 하려는 일이 지역 사회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니, 공동체의 가치에 맞는 일이니 등등. 윤리, 가치, 정의, 선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이런 가치를 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힘들었습니다. 재미도 없었고, 경력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일이 하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만"을 결정했습니다. 착한 거 안 할래, 참는 거 안 할래, 정의로운 건 내 몫은 아닌가 봐 하고.
2022년 1월 안산 세무서에서 <문화플랫폼 열무>라는 이름의 비영리민간단체 고유번호증을 받았습니다. 법인이 아닌 단체 또는 개인에게 부여된다는 고유번호증 파일을 컴퓨터 폴더 안에 저장했습니다.
열무는 열무김치의 열무가 맞습니다. 배추 김치 보다 열무 김치가 더 맛있거든요. 찬 밥에 열무 김치를 듬뿍 얹고, 참기름 몇 방울을 더해서 먹는 여름과 초가을의 별미입니다. 물김치도, 절임김치도 담그기 딱 좋은 열무, 열무는 참 맛있습니다.
플랫폼도 그 플랫폼입니다. 모이고 흩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저렇게 연결했다 이렇게 연결하고, 이렇게 연결되다 저렇게 연결되고, 뭐 하나로 딱 정해지지 않는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그림을 떠올렸습니다. 어릴 때 그렸던 앞으로 100년 후 미래 사회의 도로 모습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지하 어디서든 교통 수단이 왔다가 갔다 하고, 길은 막 얽혀 있는 그림이지요. 이왕 플랫폼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으니, 플랫폼의 모델을 뭘로 할까 고민할 즈음, 당근 앱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건이 왔다갔다 하면서, 서로의 친절과 온기를 경험하는 시스템이 신기했습니다. 동네소식이라는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성태산 등산 같이 가실 분"이라는 글에 댓글이 줄줄 달려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열무의 롤모델을 정했습니다. 배민, 쿠팡 아님. 당근으로.
역시 '문화'쪽이 어려웠습니다. 문화예술로 해야 하나, 문화예술교육으로 해야 하나, 문화교육으로 해야 하나, 생활문화로 해야 하나, 생활문화예술로 해야 하나, 동네문화로 해야 하나, 동네생활문화로 해야 하나, 한참을(정말 한참을 몇 달 고민했어요) 생각했습니다. 길 가다 생각하고, 잠들기 직전 생각했습니다. 진지하고 심각한 사유도 아니었고, 이 생각에서 그 생각으로, 저어 먼 곳으로 훌쩍 뛰어서 딴 생각을 했습니다. 덕분에 문화가 무엇이고 예술이 무엇이고 교육이 무엇인지, 생활과 동네는 또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문화 딱 한 단어만 넣기로 했습니다. 특별한 의도는 없습니다. 이름은 심플하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라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문화' 하나만 앉히기로 했습니다.
열무에서 저는 대표입니다. 열무는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 가볍고 날렵하게 가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이사나 위원회 등도 없고요, 실무자도 저 한 사람이라 대표라고 말해놓고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습니다. 아무튼 대표는 대표이지요. 저는 열무와 함께 문화 기획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문화 기획자가 뭔데라고 질문하면 말을 길게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많이 길게 한다는 건, 아직 정리가 안 되었다는 증명이겠지요. 정리가 잘 안됩니다. 꼭 정리를 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10년 전과 현재의 문화 기획은 다르고,10년 후는 또 다를테니까요, 국립중앙박물관의 문화기획이 안산 일동의 문화 기획과 같을 수도 없고요, 축제 문화 기획과 생활문화기획은 또 다르니까요. 정리를 안 하니까, 할 말이 없냐면 또 아닙니다. 정리를 할 의도가 없기에, 이런 저런 말을 마구 하려고 합니다. 천장을 보면서 문화와 예술은 뭐지 생각하다 이렇게 그렇게 저렇게 날아가던 과정처럼 이렇게 그렇게 저렇게 횡설수설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열무의 문화 기획 출발을 누군가 질문한다면 "하고 싶다입니다"라고 대답할 예정입니다. 쓰고 싶고, 걷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리고 싶고, 기록하고 싶고, 읽고 싶고,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보고 싶고, 만들고 싶고. 저도 그랬습니다. 해야 하는, 안 하면 죄책감이 느껴지는, 누가 명령하지 않지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를 실현하는 그런 거 이제 그만을 외치고, 그 움푹 패인 자리에 "하고 싶다"를 조금씩 조금씩 채워놓았습니다.
궁금해서, 심장이 간질간질합니다.
그 많은 하고 싶다 사이에서 열무는, 열무에 연결되는 사람들이 어떤 하고 싶다를 실현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문화플랫폼 열무의 시작은 변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