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쉿~!! 조용히 하자.” 엄마는 낮고 강한 목소리로 내 어깨를 잡으며 눌러 앉혔다. 우리는 순간 입을 다물었고 뭔가 모를 긴장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달은 휘영청 밝아 꽤 넓은 곳까지 보였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외갓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날 외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셨던 것 같다. 밤이 되자 엄마는 동생과 나를 데리고 삽을 챙긴 후 들로 나가시며 ‘물꼬(논에 물이 넘어 들어오거나 나가게 하기 위하여 만든 좁은 통로)를 보러 가야 한다.’고 하셨다. 가뭄이 어찌나 심했든지 농작물들은 끝이 말렸고 논바닥은 쩍쩍 갈라졌는데 그나마 골이 깊은 논에서는 사람의 발자국 속으로 올챙이가 모여 팔딱거렸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을 논에 대기 위해서는 특히나 밤에는 물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잖으면 사람들이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남의 물꼬를 막는 통에 물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꼬는 생명수와 같아서 그 물꼬로 인해 살인까지 벌어지는 일도 많다고 했다.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오고 있었다. 엄마는 “미친 사람인지 몰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꼭꼭 숨어있어야 한다.”라고 낮게 말하셨다. 어디에 어떻게 숨었는지 기억은 없다. 우리는 최대한 몸을 낮추며 깊이 숨었다 “사람이면 나오고 귀신이면 물렀거라 ~!!!!!!!!” 삽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있는 힘껏 삽으로 땅을 찍으며 욕을 해댔다. 귀신이면 물렀거라. 그는 우리를 귀신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40여 년 전 그때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메는 시절이었으니 원한에 사무친 귀신들이 이승을 떠돌다가 해코지를 한다고 믿었으며 마을 어귀 당산나무에는 여러 가닥 꼬인 줄이 둘러쳐지고 원색의 헝겊들이 나풀거렸다. 뱀날이 따로 있었고 깜깜한 밤에 배고픈 다리를 건너게 되면 살코기 한 점씩은 꼭 떼어 주어야 그 다리를 건널 수 있다는 말을 믿던 시절이었으니까.
남자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이고 장단을 맞추듯 삽으로 땅을 찍으며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오기만 해봐라.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둥 어디서 그런 욕을 배웠을까... 갖은 욕설을 퍼부었는데 귀신은 남자와 맞짱을 뜨기 전에 욕에 나자빠지겠다고 생각하며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가 우리 눈앞을 지나갈 때는 목소리는 갈라지고 힘이 다 빠진 듯했다. 대낮처럼 밝은 밤에 여자 셋이 춤추고 노래를 불러댔으니, 그리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우리는 그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나올 수 없었는데 엄마는 그분이 물꼬를 보러 오신 것 같다고 했다. 남자이긴 하지만 분명 귀신을 무서워하셨을 테니 우리가 무사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샅샅이 뒤져서 결단 내려고 했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나는 그일 말고도 서너 번 더 비슷한 경험을 한 후 용감해졌다. 귀신은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할아버지가 되셨을 그분께는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분은 “나는 귀신을 물리친 사람이야~!!” 영웅담을 말하고 다니셨을 듯하다. ^^
이야기 둘
“올해 안에 친정아버지가 죽겠어~!!” 귀를 의심했다. 어찌 믿겠는가, 아버지는 83세가 되셨지만 정정하셨다. 무슨 말이냐고 쏘아대는 내게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되돌릴 수가 없어. 벌써 장부가 하늘에 올라가 있으니까!” 단호한 그녀의 눈빛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해 나는 삶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최악의 해였다. 몇 날 며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잠에서 깨어날 때는 잠은 어찌나 달고 맛있었든지 ‘그래 어쩌면 죽음도 이렇게 잠든 것과 같을지도 몰라.’ 생각하며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전문 자격증이 있었지만 여건이 되질 못했기에 고육지책으로 작은 분식집을 생각해냈고 이젠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데 자신이 없었다. 왜 그렇게 눈물은 나던지... 그걸 보던 지인이 오픈 날짜를 잘 잡아오라고 했다. ‘신내림 받은 지 3년 된 무당인데 참으로 용하더라.’며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런 것을 믿어본 적이 없어서 주저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결국 무속인을 찾았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던 그녀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대뜸 아빠가 죽는다는 말을 했다. 사주를 보이기도 전이었다. 부적이나 굿을 해야 한다는 말도 없었고 사람의 죽음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더 절망스러웠다. 이별은 예정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내 정신적 지주 셨기에 가시더라도 지금 가셔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두 오빠에게 알렸는데 오열하는 내게 작은 오빠는 “무당 말을 다 어찌 믿겠냐. 연세가 있으시니 그래도 전화 자주 하고 집에도 자주 들리자.”했다. 정말 아버지는 5개월 후에 영영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자식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나는 선물을 가득 사서 무속인을 찾았다. 내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또 얼마나 후회했을까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일 말고는 그녀의 신통력은 영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 무력증에 걸려있던 내가 의지하고자 그녀의 집을 또 찾았을 때 그녀는 정확한 금액과 날짜까지 짚어주며 미래를 예언했는데 전혀 맞지 않았다.
귀신이 있다고 믿진 않지만, 그러나 무속인이 하는 일들이 아예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찌 되었던 나에겐 고마운 분이다. 부디 선한 무속인이어서 힘겹고 상처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그리하여 그녀가 행복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