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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원 Aug 22. 2020

예쁜 울 엄마

 



“이응으로 생각나는 단어를 말해보세요.” 인지기능 검사를 담당하는 의사가 검사지에 체크하면서 묻는다. 엄마?! 처음 생각난 단어가 ‘엄마’였다. 갑자기 목이 메었는데 의사는 한동안 말없이 기다려준다. 아빠, 아기, 어린이, 아들, 아주머니, 아침, 아가미?! 1분 안에 생각해내는 단어가 고작 열 개 정도... 의사 선생님은 나를 안심시키느라 “잘하셨습니다. 많이 기억하시네요.” 한다.       

해야 할 말이 머리에서 맴돌 뿐 쉬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으니, 애들 앞에서 몇 번 푸념도 했을 것이었다. 녀석들이 마음에 담았던지 건강검진을 예약해 놨다니 고마운 마음으로 MRI를 찍고 인지기능 검사를 해보았다. 말하자면 효도 검진이랄까...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며 MRI상에서 이상증세는 보이지 않았으니 마음을 편히 갖으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니 다행이다 싶다. 


엄마는 올해 87세다. 건강하셨더라면 틀림없이 볕 좋은 날에는 텃밭을 매고 푸성귀를 심어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것이고 마을회관에서 친구분들과 10원짜리 화투 내기도 하셨을 것이다. 엄마는 60대 초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후에 점차 기억을 잃어갔다. 당신이 누군지도 모른 체 그렇게 엄마의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으니 같은 여자로서 딸이 보는 엄마의 일생은 한없이 가엽고 아프다. 12년 전 평생을 함께한 당신의 남편이 먼 길을 떠났다는 그 사실도, 깜깜한 어둠에 대한 무서움도 다 잊어버리셨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사 남매는 사는 게 고만고만하여 부모님이 자랑할 만한 자식들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자식을 위해서 매일 따뜻한 밥과 좋은 옷을 챙기면서도 또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생명까지도 내어줄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내 부모에게는 용돈은 몇 번이나 드렸으며,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드리는 것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인연을 따라 유교 집안의 8남매 막내아들과 결혼했다. 그리고 시아버님을 모시고 5대조까지 제사를 지내게 된다. 4년 동안은 건강하셨던 시아버님이 갑작스럽게 ‘시신경 손상’으로 눈을 보지 못하게 되신 후 점차 몸을 가누지 못하셨고 5년 후에 작고하셨다. 그때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을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보질 못했다. 명절 차례상이 성주 상까지 여섯 상이면 5번의 제사에 명절과 보름을 합쳐 8번이었고 가족들 생일상까지 챙기면 어떤 해는 한 달에 두 번꼴이 되기도 했는데 형제는 8남매였으나 모두 들 먼 타지에 사는 터라 손님이나 다름이 없었고 어린 자식 셋에 눈먼 아버님이셨으니.... 그런데 나는 왜 생각조차 못 했을까, 아버님이 드실 음식을 만들어놓고 남편에게 식사를 챙겨드리라 하고 친정에서 며칠 머문 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간단한 일을 아빠 살아생전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나의 아둔함이 뼈에 사무쳐 길을 가다가도 아빠 생각이 나면 금세 눈물이 차오르곤 한다. 시아버님 작고 후에도 장남인 큰 시숙은 제사를 지낼 생각이 없었고 나는 또 많은 세월을 제사와 명절 차례상을 차리는 데에 얽매어있었다. 그러나 딱히 억울하다는 생각은 없다. 내 아이들의 조상님이니까 희생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으니 그것으로 감사하며 산다.    



엄마의 방엔 TV와 불은 항상 켜 둔다. 채널은 가요 방송에 맞춰놓는데 옛날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기도 하시고 그렇다고 TV를 이해하시는 건 아니다. 딸인 나에게 사촌 동생 ‘춘애’라 부르면 나는 춘애가 되고 엄마의 외숙모가 되기도 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샐쭉 눈을 흘기는 엄마가 귀여워 입술에 뽀뽀해주면 엄마는 금세 입꼬리를 올리며 깔깔깔~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이 좋다.           

엄마의 작은아들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대단하다. 딸인 나는 알아보지 못해도 아들들의 이름은 곧잘 말하기도 하는데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작은아들 장가를 꼭 보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신다. 끼고 있는 반지와 목걸이를 빼놓고 또 어딘가 숨겨둔 금도금을 입힌 액세서리도 꺼내어 보따리 속에 단단히 여미고는 “장에 가자~!!”라고 나서면 우리는 “엄마, 지금은 밖이 추우니까 날 따뜻한 날에 꼭 가요.”하며 다독이지만 엄마의 굳건한 결심은 식을 줄을 모른다. 부모는 자식을 결혼 못 시킨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는가 보다     

      

엄마는 일주일에서 3일 정도는 조금은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데 맑은 정신이라야 엄마의 고단한 세월에서의 기억을 되살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본능을 일깨우는 정도다. 그 정신은 3일 내내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곁에 아무도 없다 치면 옷장과 서랍장을 다 뒤져 보따리 보따리를 싸놓고는, 방을 빠져나갈 묘수를 생각해내고 마땅한 도구까지 마련해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렇게 몇 번은 마을 앞까지 진출하시니 엄마는 신나는 탈출이었지만 자식들에겐 난감하기만 하여 어쩌는 수 없이 밖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 생긴다. 엄마는 잠긴 방문을 열어 보다가 당신이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면 신세 한탄을 하며 울기도 하고 넋두리를 하시는 거다.     



     

1963년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44세 되던 해, “회사에 출근하려고 버스를 타러 가는데 길가에 서 있던 트럭에서 병원에서 쓰는 커다란 산소통이 떨어지며 금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셨다. 그때 공장장이셨던 아버지는 산소통의 위험성을 너무 잘 알기에 본능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뛰었는데 산소통은 터져버렸고 아버지의 두 다리는 결국 절단되고 말았다. 그날의 사고는 서울에서 ‘대형 폭발사고’로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단다. 어린 자식 넷에, 보험도 없던 그 시대에 길을 가다 사고가 났으니 부모님이 앞으로 살아야 할 그 암담한 심정을 어찌 미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 부모님은 그 험난한 세월을 사시면서 우리 4 남매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비가 올라치면 아버지의 없어진 두 다리는 전기고문을 하듯 극심한 통증에 아파하셨는데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내 온몸이 저릴 정도였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야 비로소 통증도 함께 사라졌으니 나의 버팀목이셨던 아버지를 ‘이젠 더는 아프지 않을 테니 아빠, 부디 잘 가시라’고 보내드릴 수 있었다.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면 어떨까?” 오빠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비교적 가까이에 살기에 아버지 떠나시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엄마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 책임감이 들면서 눈앞이 깜깜했다. 집에서 10분여 거리에 시립요양원이 있다. 그 요양원에 도자기 체험 강사로 일주에 한 번씩 방문하는데 시립이라 시설도 좋고 그곳 담당 선생님이 자신의 고모도 그곳에 5년을 모시고 있다며 추천도 받았다. 내가 엄마 가까이서 자주 가보는 게 낫지 싶어서 꺼낸 말이었는데, 두 오빠는 펄쩍 뛰었다. 요양병원이든 요양원이든 여럿이 같이 쓰는 단체생활인데 밤에 엄마 혼자 몇 날을 깨어있다면 민폐는 물론이지만 시설 측에서 달리 방법이 없는 최악의 경우, 수면제로 잠을 재울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작은 오빠가 회사를 정리하고 엄마 곁으로 오는 것을 택했다. 오빠가 비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에 큰오빠는 은퇴하여 친정 가까이 집을 마련했다. 한국은 노인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여서 일주일에 4일간은 두 시간씩 요양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금요일에는 방문목욕차가 와 목욕 서비스를 해준다. 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친정에서 자고 일요일에 돌아오며 내가 못 가는 날에는 멀리 있는 여동생이 다녀간다. 만일 엄마가 심한 치매여서 자식들을 지치게 했다면, 혹은 형제들이 모르쇠로 일관해서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 크다면 우리는 엄마를 요양원에 모셔야만 했을 것이다. 다행히 엄마의 상태는 얌전한 치매에 속해서 감사한 일이다. 작은 오빠는 요리 솜씨가 좋아 치아가 부실한 엄마에 맞춰 음식을 해드리고, 큰오빠는 커다란 몸으로 재롱을 피우며 엄마를 즐겁게 해 드리니 두 오빠에게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           


엄마는 이제 눈에 띄게 쇠잔해져 휠체어에 앉으려면 두세 명이 부축해야 하니 기저귀에 행여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것이 주요 관건이 되었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주말이면 술상을 차리고 그동안 각자의 삶을 사느라 소원했던 날들을 소회 하며 세상사 얘기꽃을 피운다.           

홀연히 아버지가 떠나신 후에야 뒤늦게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 철이란 게 엄마가 자식도 못 알아보는 지경에 와서야 잘해드린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은 엄마를 위함이 아니라 순전히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함이란 것도 안다. 엄마가 우리 형제들의 끈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 옛날~ 옥색 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 이미자 님의 목소리는 세월이 가도 여전히 낭랑하고 아름답다. 엄마는 꿈을 꾸시는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 내비 둬~~~ 어!!” ㅋㅋㅋ  따뜻한 엄마의 손... 나를 키우며 엄마의 손길은 수천 번 , 수만 번만 받았을까... 내가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므로 그것은 나의 생명이 엄마에게서 왔음이다. 머지않아 먼지처럼 사라질 내 엄마, 안고 있어도 나는 엄마가 그립다.                         



P.S. 치매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람마다 각기 처한 상황이 다른데 행여 내 글이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일었다. 어느 누군들 내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뒤돌아 죄스러움에 찢어질 자식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정갈하신 어머니라도 연로하시니 약봉지를 달고 사시는데 혼자 계시다 쓰러지지는 않을까, 반찬 한두 가지로 끼니를 해결하실 것도 걱정이고, 더구나 홀로 계시는 아버지라면 자식들은 더욱 신경이 쓰일 것이다. 요양원에는 비슷한 연령의 친구분들이 계시고 의사와 요양보호사들이 상주하여 돌봄을 해주며 활동적인 프로그램들도 있으니 요양원으로 모심이 자식으로서는 안심이 될 것이다. 요양원의 선생님 한 분은 '이곳도 건강만 하시다면 요양원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다 참여하실 수 있다.'라고 하며 그러니 어디서든 건강해야 하지 않겠냐고, 부모님의 세대는 요양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니 인지능력이 남아 있는 어르신들은 당신이 '자식들에 의해 버려졌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서운 함중에 자식의 편에서 다 이해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양원 안에서 '자식들이 얼마나 자주 찾아오느냐에 따라 부모님들은 기가 살아난다.'라고 하니 모실 수 없는 형편이라서 부득이 요양원에 모셨다면 자주 찾아뵈어야 할 일이다.


4년 전 증손녀가 태어났고 백일이 지난 후 증손녀와의 첫 대면이다.  그날 엄마는 아기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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