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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Oct 20. 2023

[시즌1] ep 1. 나를 기억해줘

2023. 1. 16. 


“근데 너 여수 산다고 했지?

아니다, 순천인가?"


어느덧 10년을 알고 지낸 선배는 아직도 내가 순천에 사는지 여수에 사는지 헷갈려 한다. 서운하지는 않다.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나도 그들이 서울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송파구에 사는지 서초구에 사는지 매번 헷갈리니까. 특히 내가 3년 전부터 여수MBC 에서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가 된다.


대학 신입생 때는 서로 출신을 묻다 보면 ‘순천’이 어디 붙은 곳인지도 잘 모르는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지방대인데도 서울이나 경기 출신 학생들이 많아 퍽하면 “춘천? 순창?” 이라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는 미리 선수를 쳤다. 순창 고추장의 순창도 아니고 춘천 닭갈비의 춘천도 아닌, 순천만 습지와 갈대밭이 유명한 전라남도의 순천에서 왔다고! 내세울 게 자연 뿐이라(?) 좀 머쓱했지만 그래도 “너 그럼 감자 많이 먹어?(강원도)”라거나, “그럼 고래 타고 다녀?(울산)”같은 말은 안 들을 테지 생각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맑은 눈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와! 그럼 너 요리 잘 하겠네?”


미안하지만 엄마가 해주는 밥만 받아먹으며 귀하게 자라서 요리는 못 한다고 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수도권 아이들에게 순천이란 그냥 그런 도시였다. 그냥 전라도 어디매의 도시이고, 전라도는 음식이 맛있는 어디매일뿐. 그래도 다행인 건, 경전선과 전라선이 만나는 환승역이었던 순천이 ‘내일로’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2013년에 국제적인 정원박람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순천’ 이라고 하면 한번에 알아 듣는 사람들이 생겼다.


4학년 1학기를 마칠 쯤, 공무원 시험을 쳐보라는 부모님의 제안을 마지못해 수락하고 시험을 쳤다. 지방직 공무원은 접수할 때부터 지역을 정해서 그 지역을 선택한 사람끼리 경쟁하는 구조다. 일곱 살 때부터 살기 시작해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곳이니 250개가 넘는 지역 중에 한 군데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순천이어야 했다. 아무런 계산이 없었다. 공부를 시작한지 1년이 안 되어 합격하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거봐! 내가 너는 '관운'이 있다고 했지!”


그렇게 순천으로 돌아왔다. 포항으로 짐을 싸서 떠날 땐 다시 순천에서 살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눈떠보니 어느새 엄마아빠 집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더라면 악착같이 서울에 자리잡으려 애를 썼을까? 곧 죽어도 서울시 공무원이 돼야겠다고 떨어진 서울시 시험에 다시 도전했을까? 공무원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방대생이었던 나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딱히 버려야 할 것이 없었다. 서울이라는 편리, 기회, 가능성 같은 것들을 누려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방이’가 되고 난 후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순천에서 왔던 걔가 다시 순천으로 돌아가자 친구들의 머릿 속에는 ‘순천=>권수정’이라는 공식이 박혔다는 거다(권수정=>순천 은 조금 요원하다). 이제 친구들은 어디서 순천 광고만 봐도, 순천 얘기만 나와도 내 이름을 떠올린다. 전라도에 전혀 연고가 없던 사람들에게는 아예 내 존재가 전라도의 표상일 때도 있다. 출장 차 여수라고, 명절이라 고흥에 왔다고, 상견례 하러 광양 간다고, 오는 연락도 가지가지 군데군데다. 그런 연락이 반갑고 뿌듯하다.


우연히 뉴스를 듣거나 길을 지나다가 부산이나 대구, 인천 같은 대도시의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구체적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은데. 특히 서울에는 너무 많은 친구들이 살아서 누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누구에게 만나자고 해볼까 고민이 되겠지. 하지만 순천이라면, ‘권수정’ 한 사람만 생각하면 되리라!

내가 여수에 사는지 순천에 사는지 헷갈려하던 선배는 “순천에 갈 일이 생겼는데, 일정이 빠듯해서 얼굴보자고는 못하겠다. 그래도 순천 땅 밟는데 너한테 보고는 해야 될 것 같아서.”라며 자기의 방문 사실을 ‘보고’했다.


올해 4월엔 10년만에 정원박람회가 다시 열린다.

아무래도 올해는 보고 받을 일이 많을 것 같다.



권수정

순천시 주무관. 대학시절 5년을 포항에서 보내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만년 지방이. 여수 MBC 라디오에서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주방랑> <권수정 산문집> 등 세 권의 독립출판물을 냈다. 때때로 상경한 친구들이 부럽지만 아무래도 지방이 몸에 맞다. 필진 중 유일한 미혼자로, 결혼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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