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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Oct 20. 2023

[시즌1] ep 2. 비효율과 비합리의 마지막 보루

2023. 1. 23. 

지방직 공무원이 되고 처음 발령 받던 때가 생각난다. 나는 순천과 여수의 경계에 있는 어느 면사무소에서 첫 보직으로 민원대에 앉았다. 공무원이 됐다고 하니 친구들이 "그럼 너 등초본기계 되는 거야?"라고 장난스레 묻고는 했는데, 정말 그 업무를 맡게 될 줄이야. 민원대는 초짜 공무원이 맡기에는 그나마 수월한 업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 하루하루 기가 빨리고 지치는 업무이기도 했다. 아마 이 시간을 거치면서 내 MBTI의 앞자리가 E에서 I로 바뀌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물론, 지금 내가 I라는 걸 믿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등초본 수수료는 400원, 인감증명서는 600원, 가족관계에 관한 서류는 1,000원, 지방세 세목별 과세증명서는 800원.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지만 수급자나 장애인, 국가유공자 같은 분들에게는 발급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최소한의 경제생활조차 어렵거나,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공공기관이 제공할 수 있는 작은 혜택 중 하나다.

 

민원대에서 일하는 동안 종종 이 수수료 면제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있다. 서류를 떼기 전에 먼저 면제대상자라는 걸 밝히지 않는 분들 때문이다. 선배들 말이, 예전에는 서류를 출력하고 수동으로 수수료 금액을 찍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쓰는 기계는 컴퓨터에서 서류를 발급하는 순간 스테이플러가 알아서 찍히고, 수수료가 인쇄되는 건 물론이요, 하나의 서류라는 표시로 천공까지 뚫려 나온다. 동시에 세 가지 일을 덜어주는 셈이다. 선배들은 "좋은 시절에 공무원 하는 줄 알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기다린다. 시민들이 관공서 가기 귀찮다고 집에서 ‘정부24’에 들어가 직접 모든 서류를 떼는 그 날을! 그 날이 오면... 퇴직하려나?

 

서류 출력은 기본적으로 유료 모드라 자동으로 수수료가 찍혀 시 수입으로 잡힌다. 그래서 수수료를 면제하려면 출력 전에 미리 설정을 바꾸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저것 요청 받은 서류를 다 떼고 나서 얼마라고 요금을 말씀드리자 그제서야 "저 면제자인데요."라고 알려주는 민원인들이 있었다. 그분들께 이미 뽑은 서류라고 억지로 요금을 받을 수도 없어서, 나는 결국 서류를 전부 결손 처리하고 처음부터 다시 발급해서 드리곤 했다. 등초본 한 두 장이면 괜찮지만, 서류 종류가 다양하고 많을 때,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 때는 정말 답답하고 울고 싶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어서 민원인께 "선생님, 다음엔 면제자라고 말씀해주세요. 요즘엔 처음부터 다 요금이 찍혀서 나오거든요." 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예전에는 알아서 체크를 해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발급 시스템에서 면제 대상자인지 여부를 조회해볼 수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확인하고 면제를 해줬다는 거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궁금해졌다. 민원 업무를 보는 사람은 수십, 수백 명인데 그 중에서 몇 되지 않는 면제 대상자인지를 확인해보는 작업이 번거로워서였을까? 그것도 맞는 얘기지만, 사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 공무원이 민원인이 먼저 요구하지 않았지만 알아서 면제자 여부를 확인해서 요금을 면제하고 서류를 발급해 줬다. 그런데 민원인은 무료로 해달라고 말도 안했는데 왜 면제 도장이 찍힌 서류를 주냐며 벌컥 화를 냈다는 이야기. 에이,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설마가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만약 그게 학교 같은 곳에 제출할 서류였다면, 아이 편에 들려 보냈다가 거기 면제 도장이 찍혀 있는 게 부끄럽고 싫었을 수도 있다. 면제 받지 않고 지불할 용의가 있는데, 자신이 기초수급자인지 국가유공자인지 공무원 마음대로 조회를 해본다는 게 석연찮았을 수도 있다. 담당자는 선의로 한 일이었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납득이 가는 분노였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은 후에는 먼저 면제를 요구하는 분들에 한해서만 대상자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면제해 주게 됐다고 한다. 그 후에 다른 민원인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전에는 알아서 다 확인을 해주지 않았냐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그분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내게 공무원으로 일하는 게 언제 가장 괴롭냐고 묻는다면, 4년차에 200만원도 못 받는 월급날이 아니라, 목적을 모르는 일을 하거나 너무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일하고 있을 때라고 답하고 싶다. 뭔가 개선하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없거나, 아무도 관심이 없거나, 말을 해도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왜 이 사회의 비효율과 비합리가 사라지지 않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십장의 서류를 결손 처리하고 같은 일을 두 번 하는 비효율이 있더라도, 그게 혹시나 모를 단 한 사람의 사회적 존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400원을 내고 내지 않고가 존엄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걸, 나는 일을 통해 배웠다.


사법체계의 원칙 중에는 ‘열 사람의 범죄자를 놓칠지언정 무고한 시민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몰라도 공무원은 정말 그런 일을 한다(사법부도 결국 공무원이다). 열 배는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혹시나 모를 아주 작은 공익을 지키는 일.

 

나는 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비효율과 비합리의 마지막 보루 위에 서있다.





권수정

순천시 주무관. 대학시절 5년을 포항에서 보내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만년 지방이. 여수 MBC 라디오에서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주방랑> <권수정 산문집> 등 세 권의 독립출판물을 냈다. 때때로 상경한 친구들이 부럽지만 아무래도 지방이 몸에 맞다. 필진 중 유일한 미혼자로, 결혼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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