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6.
부모님과 함께한 3년 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독립해서 살기 시작한지 1년 반이 넘었다. 1억 초반의 보증금, 서울에서는 원룸 전세금도 되지 않는 돈으로 나는 24평짜리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20년 넘게 성실히 일한 부모님의 집보다 더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혼자 산다는 사실이 조금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어쨌든 비참한 공무원 월급으로도 부모를 떠나 자기만의 방을 넘어 ‘자기만의 집’을 가질 희망이, 아직 이 도시에는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때때로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반대 방향의 힘이 되기도 한다.
독립할 때는 어차피 결혼하면 부모님과 헤어질 텐데 조금이라도 더 살다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앞으로 인생에서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니 그리 많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 때문에 반드시 독립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내내 함께 살던 부모의 그늘을 떠나는 유일한 계기가, 또다른 타인과 평생을 살기 시작하는 ‘결혼’뿐이라는 건 너무너무 끔찍했으니까.
집에서 나온 후로는 주일 예배가 나와 부모님이 만나는 정기 미팅 시간이 됐다. 신앙을 지속해야 할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음에도 그 시간 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보려 하는 건, 떨어져 사는 사이에도 별다른 약속 없이 만나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나면 부모님과 친한 집사님 권사님들과 어울려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바쁘지 않으면 부모님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도란도란 일주일 간의 얘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의무감처럼 밥만 먹고 나오는 날도 있다.
내 집과 본가와의 거리는 차로 15분 정도라 그렇게 멀지도 않고 (소도시 치고는) 가깝지도 않다. 내키면 얼마든지 자주 드나들 수 있겠지만 자주 내켜지는 거리는 아니랄까. 독립한지 1년 반이 넘었는데 그동안 부모님은 우리집에 딱 두 번 오셨다. 이사하던 날과 입주예배 날이었으니 안 오신지도 벌써 1년이 넘은 셈이다. 한 도시에 살면서도 내 공간을 거의 침범한 적이 없는 부모님께 종종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이 키운 자식은, 선의라고 해도 그런 침범은 딱 질색이라는 걸 더 잘 아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럴수록 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그 몇 시간이 꼭 최소한의 도리처럼 여겨진다.
몇 년 전, 아직 내가 대학생이었던 때에 엄마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네가 해외로 나가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다 준다고 해도, 일 년에 한두 번, 몇 년에 어쩌다 한번 얼굴 보며 사는 건 싫어. 그런 돈 갖다 주지 않아도 되니 가까이 살아. 그게 돈보다 귀하니까.
그땐 엄마도 막상 액수가 커지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겠냐고 장난스레 받아쳤는데, 요즘에는 엄마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 것 같다. 꼭 엄마의 말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느덧 나는 고향에 착 눌러앉아 도리어 부모님께 빚을 져가며 살고 있다. 그러니 좀 더 투자해서 공무원 말고 좀 더 돈 잘 버는 직업을 시키지(?) 그랬냐고 뻔뻔하게 굴어 봐도, 부모님은 딱히 내게 더 바랄 게 없다는 눈치다. 아마도 결혼 말고는.
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따로 또 함께 살아간다는 게 서로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알아가고 있다. 나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가 해준 밥을 먹을 수 있고, 엄마가 방금 만든 반찬을 싱싱한 상태로 챙겨올 수 있어서 좋다. 가끔 집에 떨어진 생필품을 공짜로 챙겨올 수 있고, 공인인증서가 만료됐다는 둥 은행 자동이체 설정을 해야 한다는 둥 갖가지 사소한 일들로 날 귀찮게 해도 답답하게 전화기를 붙잡고 설명할 필요 없이 15분만에 달려가 얼른 해결해주고 올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내일 모레면 환갑인데(한쪽은 이미 넘었는데!) 아직도 아옹다옹거리는 두 사람 사이를 종종 솔로몬처럼 중재해야 하지만, 어쩌다 몸이 아파도 혼자가 아니라는 게 좋다.
엄마아빠는? 그냥 내가 가까이에 있어서 다 좋다.
권수정
순천시 주무관. 대학시절 5년을 포항에서 보내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만년 지방이. 여수 MBC 라디오에서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주방랑> <권수정 산문집> 등 세 권의 독립출판물을 냈다. 때때로 상경한 친구들이 부럽지만 아무래도 지방이 몸에 맞다. 필진 중 유일한 미혼자로, 결혼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