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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Oct 20. 2023

[시즌1] ep 5. 감기에는 약이 없다지만

2023. 2. 20. 

회사에 복직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다시 시작한 업무 패턴과 새로운 부서 생활에 이제 막 적응이 되려는 차에 갑자기 프로젝트 팀으로 파견 발령을 받았다. 언질을 받은 게 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발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술 한잔 못하며 헤어진다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부서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일해보고 싶은 부서였는데, 친해지고 싶은 직원들이 있었는데, 이제야 일 돌아가는 모양을 조금 알 것 같았는데... 미련은 남았지만 갈등이나 혼란은 없었다. 발령이야 인사권자 마음이니 가라면 가는 수밖에. 바꿀 수 없는 상황은 조금이라도 빨리 받아 들이는 수밖에.


풀어 두었던 짐을 커다란 모던하우스 쇼핑백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으면서 새 부서에 적응할 내 모습을 상상했다. 간부들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드리고, 친한 직원들과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며 너스레를 떨고, 아직 친해지지 못한 직원들 사이에서, 유독 일할 때 화가 많은 스스로를 다스리느라 호흡을 고를 내 모습을.


새 부서에 인사를 하고, 당장 주중에 정리해야 할 일들을 끝내기 위해 정신없이 일부터 시작했다. 일하는 내내 목이 자주 마르고 칼칼했다. 갑자기 너무 사람 간의 밀도가 높은 곳에 와서 공기가 안 좋나, 대수롭지 않게 첫 날을 넘겼다. 


다음날 아침, 어제보다 목이 더 아팠다. 칼칼한 정도를 넘어 따끔하고 얼굴에 오르는 열감이 심해졌다. 새 사무실은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히터를 온 사방에 틀어 두는 바람에 앉아서 숨만 쉬고 있어도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가 핑 돌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옆 팀에서 시시콜콜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조차 시끄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지만 일이 남은 상태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발령 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아프다는 소리를 꺼내기도 불편했다. 내 몸이 먼저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일을 잡고 있는 게 책임감인지, 멍청함인지 알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거울 속의 나에게서, 허리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늘 무리해서 일을 하고 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퇴근길에 약을 샀다. 지방방송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수요일이었지만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사흘차, 어제 약국에서 산 쌍화탕과 감기약을 먹고도 몸은 더 악화됐다. 깊은 곳에 고인 콧물은 코를 풀어도 잘 나오지 않았고, 어쩌다 덩어리 째 나오면 피가 섞여 있었다. 열이 오른 벌건 얼굴로 출근을 하면서 오래 전 나를 충격에 빠뜨렸던 ‘감기에는 약이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감기약이라 믿고 사먹었던 약들은, 몸에 나타나는 증상을 완화시켜줄 뿐이지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해주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고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던지. 어제 산 감기약 뒷면의 효능 란을 살펴보니, 거기엔 정말로 ‘감기 증상(…)의 완화’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그렇지. 결국 싸움은 내가 하는 거지. 감기 하나도 남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는 없는 거야.


바이러스와의 싸움이라는 건 온전히 내 몸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고, 약은 그 싸움의 흔적을 좀 더 빨리 아물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내가 전쟁에 나간 군인이라면, 약이란 야전병원의 의무팀 같은 거랄까. 회사 일이 그랬듯 이러나저러나 내 일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얘기 같아서, 인생의 모든 일이 다 이런 것 같아서 나는 갑자기 쓸쓸해졌다. 결국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잘 싸우고 버텨내기를 바라기로 했다.


그날 저녁, 지방방송 멤버들과 예정된 미팅이 있었지만 몸이 너무 안 좋아 미팅을 미루었으면 좋겠다고 톡을 보냈다. 약속한 마감일을 지키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예상치 못한 비싼 비타민 영양제가 선물로 돌아왔다. 싸움은 혼자 하는 거라며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비장하게 출근했던 아침이 떠올랐다. 영양제 하나로 아픔을 훌훌 떨쳐낼 수는 없지만, 몸에게 잘 좀 싸워보라고 힘을 실어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응원 때문에라도 더 씩씩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든 혼자 다 해내며 살아온 것처럼 보여도 버틸 힘을 주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아플 때 자연스레 서랍을 뒤져 찾게 되는 상비약 같은 사람들이. 6주 동안 함께 글을 썼던 지방방송 멤버들도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글은 혼자 써내야 하는 것이라지만, 부족한 건 덮어주고 조금이라도 좋은 건 실컷 칭찬해가면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응원했다.


끝내 혼자 하는 싸움이라도 덜 힘들게 이겨낼 방법은 있다. 

감기에는 약이 없다지만, 인생에는 친구라는 게 있으니까. 




권수정

순천시 주무관. 대학시절 5년을 포항에서 보내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만년 지방이. 여수 MBC 라디오에서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주방랑> <권수정 산문집> 등 세 권의 독립출판물을 냈다. 때때로 상경한 친구들이 부럽지만 아무래도 지방이 몸에 맞다. 필진 중 유일한 미혼자로, 결혼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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