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온천에서 시작하다 ( 일본 아오모리 여행기 1)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알고도 모를 것이 더 많은 나라 일본!
인천공항에서 2시간 여 비행기를 타고 내린 곳은 아오모리 국제공항이었다. 4개의 큰 섬 중에서 홋카이도를 사이에 둔 혼슈의 최북단 지역인데, 북위 40도 지역인 우리나라 함경도와 동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이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설국 속으로 깊숙이 달려갔다. 창밖으로 파랗게 게인 하늘 아래 빛나는 설원 풍경이 펼쳐졌다. 가도 가도 눈이고 도로변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각을 맞춘 설벽이었다. 얼른 보아도 높이가 2-3m 는 되어 보였다. 멍하니 차창에 기대여 있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아사무시 온천이란 곳에 도착했다.
400여 년 전부터 이 지역 제일의 온천 숙소라는 츠바키 칸(동백꽃 여관)에 여정을 풀고 유가타라는 마치 우리 전통 두루마기 같은 면 옷으로 갈아입었다. 일상 온천 생활에서 입고 활동하기에 맨 살에 입어도 되지만 남녀가 같이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내복을 입고 겉에 걸치는 식으로 입었다. 전통적인 다다미방에 낯선 이부자리였으나 고풍 가득한 곳이라 별 거부감 없이 첫밤을 맞이했다.
새해가 시작되는 아침, 딸이 나를 깨웠다. 이국 천리에 와 딸과 설 명절을 맞이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왜 오늘을, 아니 새해 아침을 이렇게 맞이해야 하느냐 생각할 때 마음 가누기 힘들어 잠은 깼으나 속으로 한숨 쉬며 누워있을 즈음이었다.
“잘 잤어? 많이 고단했지?”
마음과 달리 밝게 대답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한숨에 깊이 잤다”하며 딸과 새해 첫 대화를 시작했다.
“나도 아주 잘 잤어.” 대답하는 딸에게, “이토록 좋은 계획을 사전에 일언반구 없이 마련한 네가 참으로 고맙다. 역시 김 심청이다.” 하며 애써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자, 온천부터 시작해요!” 딸과 함께 유가타를 걸치고 온천으로 향했다. 진정한 여행 일정의 시작이었다. 40도 넘는 탕에 몸을 담그고 탕 밖을 바라보고 누워있는데, 밤새 내린 눈이 나무들을 온통 덮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눈에 눌려 늘어질 정도였다. 함박눈이 계속해서 내리는 가운데 새해 아침 이렇게 포근하고 차분한 설경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우리 외로운 부녀에게 좋은 선물을 주신 것 같아 더욱 감사하고 감사했다.
밖으로 보이는 노천탕 위에 내리는 함박눈은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그 평온하고 평화스러운 탕에 뛰어들고 싶어 추위는 생각지 않고 그 품에 안겼다. 상쾌했다. 머리 위로 함박눈이 내리고 열탕의 수증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상상하지 못했던 낭만이었다. 그간 많은 온천을 다녀봤지만 이런 분위기 있는 온천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 늦은 줄도 모르고 도취되었다. 어느 새 탕 안엔 나 홀로 남아있었다.
“이거 어쩌나?” 급히 나가 식당에 가니, 일본 고유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식당 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광경이었다. 오래전 일본 출장 갔을 때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무심히 지나쳤는데,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때와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이 곳에선 시간이 멈춘 듯했다.
'가이세키'라 불리는 개별 독상을 앞에 두고 딸과 나란히 앉아 일본 귀족이나 무사들의 당당한 모습을 연상하며 먹었다. 설날 아침으로 조금도 손색없을 정도로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이었다. 한국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했다면 딸과 나 단 둘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생각하니, 이 곳으로 인도한 딸에게 고마운 마음 간절했다.
"좋은 아침, 좋은 음식이구나! 고맙다.”
“아빠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나도 좋네요” 딸도 미소 지었다.
자유로운 휴식과 온천의 시간 그리고 지루할만하면 이어지는 명상과 각종 프로그램들 본격적인 온천 여정이 진행되었다. 출발하는 마음은 감당키 어려운 외로움이었지만 이곳에서 시작된 일정은 신기하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