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비가 오더니 뒤늦게 무더위가 기승이다. 세 살인 둘째는 좀 더 자도 좋으련만 새벽같이 일어나서 기어이 제 엄마를 깨운다. 아침잠이 많은 아내를 위해 둘째를 좀 봐줄까하다가 지체되는 시간이 두려워 모른 척 집을 나선다. 아침 시간 2~30분이 오전 시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건 또 하루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회사가 아닌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내게 1분 1초는 돈 이상의 의미다. 가족을 위한 나의 희생이 아닌, 나를 위한 가족의 희생..
글을 쓰겠다고 직장을 그만둔 지 6개월 째.. 부모님 도움으로 대출 끼고 장만한 아파트를 팔아 전세로 옮기고, 그 차액으로 1~2년간 버텨보겠다는 게 처음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빠진 부동산 경기 탓에 집은 팔리지 않고, 부동산에 내놓은 집값만 내린 게 벌써 세 번째..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마지노선은 그동안 낸 대출이자를 감안하면 손해인데, 그나마도 거래가 성사될 지 의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5개월을 버틴 게 신기할 정도다. 누구보다 아내의 희생이 컸다. 5년 동안 일한 회사에서 달랑 한 달치 월급을 퇴직금으로 받고 일을 벌인 남편 때문에, 지출을 줄이고, 숨겨두었던 비상금을 털고, 애 둘을 데리고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를 다니고, 결혼 예물과 여섯 살 큰애의 돌 반지를 팔고, 보험을 해약하고..
어제, 아내가 인터넷뱅킹을 하고 있길래 이번 달 카드 대금을 입금시켜 달라고 했더니 통장에 잔고가 없단다. 당연한 사실 앞에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은 내가 저질러 놓고 정작 중요한 일들은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미안했다. 돈이 궁해질 때마다 걱정을 하다가도 어찌어찌 넘어가는 걸 보고, 아내가 무슨 요술 지팡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총도 없이 최전방에서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나는 후방 진지에 숨어 있으면서 전략을 짠다고 고심하는 척했던 꼴이었다. 아내가 어두운 얼굴로 둘째의 돌 반지 세 개를 만지작거리고, 마지막 남은 큰애의 보험 해약금을 계산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후방에 있었다. 최전방의 병사들이 포화 속에서 죽어갈 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쌍안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휘관의 모습.. 그걸 과연 어쩔 수 없는 역할 분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윗입술 오른쪽이 화끈거린다. 몸속에 잠복해 있던 헤르페스(herpes) 바이러스에 의한 입술포진. 체력이 떨어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면 나타나는 몸의 신호. 조만간 입술이 수포를 터뜨릴 기세다. 전쟁이 끝나면.. 전공(戰功)을 독차지하는 비겁한 지휘관은 되지 않겠노라며 아내를 위한 헌사(獻辭)를 쓰겠다 다짐하지만, 이길지 질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의 전황(戰況)은 패전 일보 직전이다. 그럼 나는 왜 이 무모한 전쟁에 뛰어들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적어도 남들이 벌여놓은 전쟁에서 이유도 모른 채 싸우다가 뒈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 대신 아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
근심을 숨긴 얼굴로 묵묵히 콩나물밥을 짓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현진건의 ‘빈처’와 겹친다. 마트에서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주겠다며 호박을 들었다가, 한 개에 삼천 원이 넘는 가격에 기가 질려 슬그머니 내려놓았던 아내의 손.. 식탁에는 콩나물밥과 간장, 김치가 전부였다.
- 야, 나는 소영이 네가 클 때 하는 거 보고 제일 잘살 줄 알았대이. 남자 잘 만나서 명품으로 도배하고, 들고 다니다 싫증난 명품 백 있으면 언니들한테 턱턱 던져주고, 철마다 해외여행 다니면서 멋있게 살 줄 알았더니만..
얼마 전, 처형들과 아내가 맥주를 마시면서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나 들으라고 한 얘기도 아니었고, 그런 말한 큰 처형이 원망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결혼 초, 아내와 약속한 것이 하나 있었다. 아직 제주도도 가보지 못한 아내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결혼 10주년에 데리고 간다는 것이었다. 2·30대 여자들의 로망 뉴욕! 이른 아침 안개 낀 뉴욕의 거리를 트렌치코트를 입고 거니는 것, 창밖이 보이는 한적한 커피숍에 앉아 갓 내린 원두커피와 베이글을 먹으며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마지막으로 명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명품 백이나 액세서리 등을 선물 받는 것! 이것이 아내가 꿈꾸는 결혼 10주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올해 결혼 6주년에 내가 아내에게 준 선물이라곤 지난 6년 동안 아내에게 했던 말들 중 가장 지독했던 독설이 전부였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내가 쓴 소설들을 읽지 않는다. 재미가 없고, 감동이 없고, 전적으로 너무 가르치려고만 한다는 것이었다.
- 일에 지치고 사람에 치인 사람들한테 옳은 소리만 늘어놓는 글이 먹힐 것 같아? 가뜩이나 사는 게 힘든데, 그런 사람들이 모처럼 갖는 자기만의 시간에 자기가 쓴 글 같은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글을 읽을 것 같아? 도덕 교과서 같은 소리, 누가 몰라? 세상이 그런 걸 어떡하라고?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고통스런 현실을 잊게 해주는 거야! 자기가 쓴 글처럼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늘어놓는 고리타분한 잔소리가 아니라!
-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거야. 그래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재벌 2세 남자와 캔디 같은 여자의 사랑 얘기, 그런 얘기 이젠 지겹지도 않아? 그런 저질스런 글로 시청률 올려서 득보는 사람들이 누군데? 그런 사람들이 대박 난 드라마로 스타 작가라는 명성 얻고, 머리 식힌다고 해외여행 다니는 동안에도 드라마에 열광했던 가난한 시청자들의 삶은 바뀌지 않아. 열광 뒤의 허무! 그게 그들에게 남는 전부야. 현실성 없는 판타지로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는 거라고!
- 그래도 좋다는데 뭐! 자기는 그런 글도 못 쓰잖아!
- 그건 못 쓰는 게 아니라, 써서는 안 되는 글들이야!
- 그래 좋다 이거야! 자기 같이 옳은 소리만 늘어놓는 잔소리 같은 글.. 근데, 그거 사람들이 안 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자기 같이 옳은 소리만 늘어놓은 글.. 그런 글들 지금까지 없었어? 이미 많이 있었어, 사람들이 안 읽어서 그렇지. 그렇게 보면, 자기가 저속하다고 욕하는 재벌 2세 사랑 얘기나 자기가 쓴 글이나 뭐가 달라? 다 이미 있었던 얘긴데?
- 그래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깨달을 때까지 시대에 맞게 다시 써야지!
-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아? 달라질 세상이면 벌써 달라졌어! 괜히 수준 높은 척 하지 마. 내가 뉴욕에서 베이글 향 맡고 싶어 하는 거랑 자기가 몽골 초원에서 흙냄새 맡고 싶어 하는 거랑 뭐가 다른데? 거기에도 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건 그냥 취향이야! 여자들의 허영심? 그래, 그래서 그런 꿈꾸는 여자들 중에 실제로 뉴욕에 가는 여자가 몇이나 될 것 같냐? 그런 꿈도 못 꾸니? 가 보지는 못해도 그런 꿈이라도 꾸면서 희망으로 사는 거야! 자긴 희망에 격이 있다고 생각해? 혼자 잘난 척 하지 말고 세상을 똑바로 봐! 자기는 자기가 무슨 대단한 예술가인양 착각하는 모양인데, 남들이 볼 땐 등단도 못한 서른여섯의 무책임한 가장일 뿐이야! 다른 사람들 꿈이나 희망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사람이 무슨 희망을 전달하겠다고.. 그게 희망이냐? 잔소리지! 세상 모든 걸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글을 쓰겠다고..
아내를 만나기 전, 나는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 때 동생을 잃은 후부터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여섯 살이던 동생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날은 장마 때마다 벽돌을 쌓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퍼내던 상습침수지역에 살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달동네에 우리집을 갖게 되었던 날이자, 어머니가 학교도 못 가고 열두 살 때부터 다녔던 제빵공장에서 배운 기술로 처음으로 우리 형제를 위해 카스텔라를 만들어 주셨던 날이었다. 당시 나는 가난 속에서 죄 없이 살다간 내 동생은 지역 신문에조차 나오지 않고, 죽은 사람이 유명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매스컴이 애도를 표하는 걸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었다. 더구나 훗날 머리가 큰 후에,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인들의 자화상을 대면하게 됐을 때, 그 배신감과 혐오감은 배가 되었는데, 그때 느꼈던 세상의 부조리가 지금까지의 내 정치적 성향과 반(反)영웅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당시 내가 느꼈던 건, 이름 없는 대다수 소시민들의 삶이 일부 유명인의 삶과 동등하게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울분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차별과 무관심이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정의롭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부패, 힘 있는 자들의 위선과 술수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키워가면서, 나는 그와는 반대편에서 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있는 최소한의 도덕과 정의마저 부정했다. 그런 나의 치우친 시선을 바로잡아 준 것이 아내였다. 아내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서.. 암흑 속에서 세상을 보던 내 눈이 비로소 빛을 얻었다.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고, 일그러져만 보이던 것들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삐딱한 시선이 균형을 잡기 시작했으며, 세상의 모든 편견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의 균형을 찾아준 아내의 존재가 내 글에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아빠가 되고.. 가족은 나에게 십자가였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원죄인 동시에 내 굳건한 믿음의 바탕.. 날 지탱해주고 지켜주는 믿음의 십자가가 내 글을 더욱 독하게 만들었다. 눈물겹도록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감사가 내 글에서는 표독하리만치 날카롭게 세상을 쏘아보고 있었다. 혼자라는 지독한 외로움을 벗어나 내 가족, 내 편이 생겼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나를 무서울 것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그것이 그대로 내 글에 드러났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독선적이고 표독한, 불편한 글들을 써내며 세상과의 소통에서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내가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한 온전하고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절실한 것일 수도 있음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실을 깨우쳐 준 것 또한 아내였다. 비록 악에 받친 말을 미처 다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아내는 글이라는 길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기어코 입술이 수포를 터뜨렸다. 고름이 흐르고 노란 딱지가 들러붙고.. 집에 들어가기 전 놀이터를 살펴보니 아내와 둘째가 있다. 큰애는 발레 학원에 갔을 터였다. 아내가 둘째 자전거를 좀 내려달라는 말을 하다 말고 따라 올라온다. 가방을 맨 반바지 차림의 입술 터진 남편 모습을 동네 아줌마들 앞에 보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아내가 자전거를 가지고 내려가면서 지나가듯 내뱉는다.
- 은설이꺼 보험 깼어.
마음이 편치 않다.
집에 들어온 나는 노트북을 켜고 도서관에서 걸어오면서 내내 마음에 걸렸던 문장을 바로잡는다.
원고를 백업하고 헬스 사이클을 탄다. 하루 중 유일한 운동시간.. 30분쯤 탔을까? 아내가 큰애와 작은애를 데리고 들어온다. 둘 다 울고 있다. 큰애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속상해서 울고, 둘째는 엄마 말 안 듣고 떼쓰다 운다. 아내는 큰애 때문에 속상하다. 부끄럼이 많고 주위에 아이들이 조금만 있어도 위축되는 아이..
- 저래서 내년에 유치원 가겠어?
그저 속상해서 한 말이지만, ‘유치원’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올해 초, 여섯 살이 된 큰애를 유치원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이사 문제로 잠깐 보류했었다. 아내는 입학 초기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이사 후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결국 이사도 못 가고 유치원도 못 보낸 채 6개월이 지났다.
큰애가 울면 마음이 아리다. 이상하게 애교 많은 둘째보다 큰애에게 더 마음이 간다. 첫정이라 그런 건지, 숫기 없는 큰애 모습이 어릴 적 나를 닮아 그런 건지. 평소에 하는 걸 보면 둘째가 더 예쁘지만, 둘 다 울고 있을 때는 큰애를 먼저 안는다. 눈가가 빨개져서 서럽게 우는 큰애를 달래노라면 작은애는 어느새 울음을 멈춘다.
냉장고에서 막걸리병을 꺼내 아내에게 한 잔 권한다. 아내는 맥주를 더 좋아하지만, 돈이 궁해진 이후로 맥주를 사다 놓지 않는다. 김치를 꺼내 놓고 함께 술을 마시지만, 전과 다르게 아내는 말이 없다. 등을 보인 채로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보고 있다. 아내는 대구가 고향이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 특히 관심이 많은 듯했다. TV에서는 장대높이뛰기의 여제(女帝) ‘미녀새’ 이신바예바가 나온다. 아내가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 오늘 은설이 보험 깨는데, 마음이 안 좋더라. 애들 꺼라..
- ……. 마음고생 시켜서 미안해..
- …….
이신바예바는 끝내 마지막 바를 넘지 못하고, 웬만한 남자보다 나은 체격의 독일 선수에게 금메달을 내준다.
나는 막걸리 두 잔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듯 잠이 든다.
도서관에 있는데, 민준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 도서관이니?
- 네.
- 점심이나 같이 먹자. 거기가 무슨 도서관이냐?
- 석남 어린이 도서관이요.
- 삼촌이 금방 갈 테니까 전화하면 나와.
- 네.
15분쯤 후 도착한 삼촌과 근처 고깃집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 어린이 도서관인데, 성인이 들어가도 괜찮아?
- 네, 1층은 어린이 도서실, 2층은 일반 도서실, 3층이 자유열람실이에요.
- 으음.. 넓어?
- 뭐, 그냥..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애들 시험기간이나 방학 때 아니면 널널해요. 제가 비교적 일찍 오니까 자리는 항상 있구요.
- 으음.. 어때? 요새 할 만해?
- 그냥요.. 이래저래 쫓기니까 마음은 편치 않지만, 쉬울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니까요.
- 그래, 쉬엄쉬엄 해. 그것도 다 인생 공부야.
- 네.
- 책도 많이 읽어야겠다?
- 네, 처음 시작할 때 역사서부터 읽었어요. 아무래도 세상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 그럼, 당연하지.
- 그러고 나선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이나 고전을 주로 읽었는데, 요즘엔 최신 소설들을 주로 읽고 있어요. 소위 뜨는 작가들 작품이나 등단작 같은.. 아무래도 요즘에 먹히는 작가들이나 작품 성향을 알아야 등단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세상이 자꾸 새로운 것을 원하니까요.
- 그래, 그렇겠지.
- 솔직히 저는 요새 글들 별로 안 좋아해요. 그냥 쉽게 읽히기는 하는데, 읽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어요. 의식 있고 깊이 있는 글보다 개성과 재미에 치우친 글들이 대부분이에요. 언어유희와 소재의 특성이 전부인 시시껄렁한 글들도 많구요. 갈수록 힘든 세상이 되다 보니, 독자들도 어렵고 머리 아픈 얘기보다는 쉽게 빨리 읽고 덮어버릴 수 있는 책을 찾는 것 같아요. 책에서 뭔가를 배우고 느낀다기보다, 그저 책 한 권 읽었다고 자족(自足)하는.. 뭐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
- 그래, 아무래도 살기 힘들다 보면 사람들도 편하고 쉬운 걸 찾게 되지.
- 저는 깊이 있고 의식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렇다고 뭐 어려운 글을 쓰겠다는 건 아니구요, 가장 쉬운 언어로 내용도 있고 감동도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아무래도 등단하려면 트렌드를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아요.
-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나저나 등단은 언제 하냐?
- 글쎄요.. 계속 내기는 하는데, 번번이 미끄러지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일터로 뛰어들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열심히 쓰고 있어요. 제가 처음 2년으로 정한 시한이나 등단이라는 타이틀.. 전부 하늘에 맡겼어요. 거기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구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긴 하지만, 노심초사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일 당장 일터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상황이나 운을 탓하진 않으려구요.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면 뭔가 남는 게 있겠죠.
- 그럼!..
- 한편으론 지금 이렇게 돈과 시간에 쫓기는 게 글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 ?
- 모든 게 계획대로 돼서, 제가 2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했다면.. 지금 같은 절박함 없이, 꽤 오랜 시간을 허송세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지금 유명한 문인이 된 사람들 중엔 저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을 보낸 사람들도 많구요.
삼촌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 소영이는 일 안 해?
- 요새 다시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 나가고 있어요. 한여름에는 일이 없더니, 가을철 접어드니까 다시 연락이 오나 봐요.
- 응..
- 어머니는 애들 봐주신다고 소영이가 일했으면 하시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아들 가진 어머니 욕심이고..
- 에이, 그럼! 본인이 알아서 나간다고 하면 모를까..
- 나간다고 해도 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마누라 등 떠미는 것 같아서..
- 그래, 그렇지. 그건 뭐 전적으로 소영이한테 맡겨야지. 나가면 좋은 거고, 안 나가도 할 수 없고..
-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좋게 좋게 생각하려구요. 운도 실력인 세상에서 집이 안 나가는 부동산 경기를 탓할 수도 없고, 소영이한테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싫구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 좋은 소식을 듣든, 내일 당장 일터로 나가든..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해.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소식 있겠지.
- 네.
식당을 나온 삼촌은 바로 회사로 들어가신다고 했다. 도서관 자판기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면서 창문을 연 삼촌이,
- 일요일에 별일 없으면 야구장이나 갈래? 삼촌한테 공짜표 생겼는데.. 막내삼촌도 갈 거니까, 같이 가서 머리도 좀 식히고 스트레스도 날리고, 어때?
- 네 좋아요.
- 그래 그럼, 삼촌이 전화할 테니까 일요일에 보자.
- 네.
일요일. 둘째를 보고 있다. 아내는 큰애만 데리고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를 갔다. 토요일인 어제는 가까운 곳이라 둘 다 데리고 갔었는데, 아내가 신부 친구인 척 사진을 찍는 동안 둘째는 언니와 남겨진 그 짧은 시간 동안 엄마를 찾으며 울었단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와중에 작은 키의 둘째에게 보였을 거라고는 혼란스럽게 눈앞을 지나가는 어른들의 다리가 전부였을 뿐이리라. 그게 무섭고 싫었던지, 오늘은 엄마를 따라가지 않겠다며 껌을 조건으로 내건다. 36개월도 안 된 것이 벌써 아빠와 협상을 하는 것이 웃기면서도 기특하다. 아내와 큰애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둘째의 손을 잡고 슈퍼에 들렀다가 들어왔다. 밖에 나간 김에 놀이터에서 그네라도 밀어주려 했더니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아빠가 책을 읽는 동안 둘째는 혼자서도 잘 논다. 전화 통화하는 시늉을 하며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늘어놓더니, 종내는 진짜 전화기를 들어 아버님 댁에 전화를 건다. 할머니랑 통화를 하는 듯, 엄마랑 언니는 결혼식 갔고 아빠랑 둘이 있다는 얘기까지 하더니, 아빠는 바꿔주지도 않고 알아서 전화를 끊는다. 그런 녀석이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워 평소 주지 않던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물려준다. 워낙 단 걸 좋아해서 되도록 단 것을 줄이려고 하나, 이렇게 예쁘게 잘 노는 데 안 줄 수가 없다. 쉴 새 없이 쫑알거리던 입이 조용해지더니, 어느새 다 먹은 사탕 막대를 내밀며 무릎에 앉는다.
- 은지야, 아빠가 책 읽어 줄까?
- 응. 두꺼바 두꺼바. 이거, 이거!
동요 모음 책들이 꽂혀 있는 책꽂이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책 한 권을 가리킨다.
- 은지는 두껍아 두껍아 노래가 좋아?
- 응. 두꺼바 두꺼바가 제일 좋아.
-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네 집 지어줄게
내 집 지어다오
똑같은 노래를 몇 번씩 불러달라며 따라부르더니, 어느새 눈을 비비며 묻는다.
- 아빠, 엄마 언제 와?
- 어, 이제 금방 올 거야.
- 결혼식장에서 사진 찍고 와?
- 응.
낮잠을 자야 할 시간, 졸린 모양이다. 아빠 품에 기대 그대로 자는가 싶더니, 도어록 누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달려간다.
- 어우, 우리 은지 아빠랑 잘 놀고 있었어?
- 응, 아빠 말 잘 듣고 울지도 않고 잘 놀았어요.
아내의 질문에 내가 대신 대답하며 칭찬해주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한다. 둘째를 안은 아내는 배가 고프다며 찬밥을 꺼낸다. 보통은 일당과 식권을 같이 지급하는데, 어제 오늘은 둘 다 식권이 없었단다.
배고프고 기운 빠진 아내에게 애들을 미루고 옷을 갈아입는다. 삼촌들과 야구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이런 걸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내는 아니지만, 밥도 못 먹고 푼돈을 벌러 갔다 온 아내에게 미안하다.
- 같이 갈래?
야구장에 가본 적이 없는 아내는 가고 싶은 눈치지만, 피곤한 몸에 애들까지 데리고 가는 게 벅찼는지 이내 포기한다.
- 갔다 와.
인천지하철 문학경기장역에서 내려 민준 삼촌에게 전화를 했다.
- 삼촌 어디세요?
- 어, 다 와 가. 먼저 올라가 있어.
역에서 문학구장으로 가는 길은 양옆이 모두 먹거리 장터였다. 치킨, 닭강정, 피자, 김밥, 떡볶이, 종류별 술에 과일 등 없는 게 없다. 문득 빈손이란 걸 깨닫지만, 삼촌들이 준비해 올 거란 믿음으로 그냥 올라간다. 한 5분 후, 1루 쪽 매표소 앞에서 삼촌들과 만났다. 둘째인 민식 삼촌, 셋째인 민준 삼촌, 막내인 민영 삼촌(삼촌은 오늘도 술에 취해 있다).. 인사를 하고 묻는다.
- 큰삼촌은요?..
- 출근했대(민식 삼촌).
삼촌들은 야구장에서 나와 만나기 전, 외할머니 산소에 들렀다 오셨다고 했다. 외할머니 산소 바로 밑에 있는 동생의 묘..
- 관리는 잘 되고 있나요?
- 응, 그럼(민준 삼촌).
매표소에서 무료 초대권 네 장을 내고 구장 안으로 들어간다.
- 서진이는요?
내 물음에 민식 삼촌이 대답한다.
- 알바 갔어.
- 알바요?
- 응, 토요일하고 일요일만 피자 배달해.
실업고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 대학에 다니고 있는 서진이.. 학비 때문에 용돈이 궁한 것 같았다.
- 효진이는 이번 추석 때 올라온다고 하고.
- 어떻게 휴가 잘 받았네요?
의아해하는 내게 민준 삼촌이 웃으며 말씀하신다.
- 걔 공무원이야. 빨간 날은 다 쉬어.
그때서야 나는 효진이가 직업 군인이라는 걸 깨닫고 웃으며,
- 아! 맞다.
시간이 이른 관계로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삼촌들은 3층으로 자리를 잡는다. 자리를 잡으러 가는 도중 막내삼촌이 묻는다.
- 소영이 아직 전어 좋아하니?
- 네, 그럼요.
- 그럼 삼촌이 조만간 전어 구해 줄 테니까, 소영이 갖다 줘.
인천어시장에서 일하셨던 막내삼촌은 가끔씩 생선을 가져다주시곤 했다. 삼촌의 그 소박한 마음에 담긴 울림은 삼촌과 나의 지난 세월만큼이나 깊었다. 어린 시절 외가댁 근처에 살았던 나는 맞벌이하는 엄마 때문에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의 손을 많이 탔다. 학교도 외할머니 손을 잡고 다녔고, 매일 계속되는 잔업과 야근 때문에 쉬는 날엔 잠만 주무시던 아빠를 대신해 이곳저곳 데리고 다녔던 것도 삼촌들이었다. 뜻도 모르고 ‘삼춘’이라고 부르던 삼촌들을, 어느 날 어머니가 ‘삼촌’이라고 정정해주던 날.. 그 다정다감하고 친근한 말이, 아빠 같고 형 같고 친구 같고, 언제나 내 편을 뜻하는 줄 알았던 말이, 단지 촌수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된 그날.. 나는 누구를 향한 배신감인지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울었었다. 그날처럼 삼촌들이 멀게 느껴진 날은 없었다. 그때 느꼈던 상처와 배신감을 삼촌들에 대한 신뢰로 회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작 삼촌들은 모르는 얘기지만.
현장감과 응원 분위기는 1층이 응원석이 최고지만, 음주가 빠질 수 없기에 조용하고 한적한 3층 내야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민준 삼촌에게서 받아든 검정 비닐봉지 안에는 김밥과 술안주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막내 삼촌이 말한다.
- 김성근이 있었으면 오늘도 꽉 찼을 텐데..
SK의 김성근 감독 경질에 관한 얘기였다. 삼촌들은 SK, 아니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의 골수팬이다. 삼미부터 청보, 태평양, 현대, SK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넥센으로 바뀐 현대가 인천을 버리고 떠났을 때, 일부 팬들이 정든 선수들이 있는 현대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삼촌들은 단호했다.
‘인천을 버린 건 우리를 버린 거야!’
상대 팀은 두산. 두산은 포스트 시즌 진출이 좌절된 6위 팀이라 그런지 관중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서울에서 온 원정 팬들 덕에 응원석만큼은 꽉 차 있었다. 삼촌들이 두산과의 경기를 택한 건 SK가 두산이나 기아랑 할 때 유독 피 튀기는 승부를 하기 때문이라 했다.
민식 삼촌, 민준 삼촌, 나, 막내 삼촌의 순서대로 앉아서 막걸리부터 한 잔씩 마셨다. 내야에선 아직 경기 시작 전이라 팬들을 위한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앉아 있는 좌석 때문에 자연스레 민식 삼촌과 민준 삼촌, 나와 막내 삼촌끼리의 대화가 이어졌다. 눈이 좋지 않은 막내 삼촌이 전광판에 나온 양팀 투수 이름을 묻고는 오늘 경기의 흐름을 예견한다. 워낙 야구를 좋아하시는 데다, 요새 집에 계시면서 SK 경기는 빠뜨리지 않고 다 보시는 관계로 믿을 만한 분석이다.
막내 삼촌의 양 허벅지엔 뼈 대신 철심 두 개가 박혀있다. 수술 후 조금씩 일을 하셨는데, 요새는 일이 없으신 건지 힘드셔서 못하는 건지 계속 집에 계신다. 근래 자주 취한 모습을 보이시는 게 마음에 걸린다.
삼촌들과 마시던 술이 막걸리에서 소주로 바뀌고.. 민준 삼촌의 소주 마시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는 바람에 관중석 스태프가 왔지만, 삼촌들의 어르고 달래는 솜씨로 금방 돌려보냈다.
경기 흐름은 막내 삼촌의 예상대로였다. 1회에 두산 김현수에게 적시타를 허용하고 1점을 내주며 추격하던 SK.. 득점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놓치더니 결국 1 : 0 패배. 상대편 투수에 대한 SK의 물방망이는 삼촌의 예상과 그대로 일치했고, 우리편 투수는 오히려 예상보다 잘 막아주었지만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삼촌들은 경기장을 나서며 5위인 LG와의 승차를 계산한다.
삼촌들과 경기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송현시장에서 내렸다. 민식 삼촌은 서진이가 아르바이트에서 받아 왔다는 추석 선물 세트를 가져온다며 잠시 집에 들렀다가 나오신다. 식용유와 햄 등이 들어 있는 선물 세트였는데, 집에 가져가라며 주신다. 쪼들리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라는 의미였겠지만,
- 집에 있어야 먹지도 않으니까.
저녁을 먹기 위해 시장 안에 있는 국밥집에 들어갔다.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 술잔이 돌려지자, 민식 삼촌이 갑자기 언성을 높인다.
- 야, 너 막내 이 섀끼야! 너 앞으로 가족들 모일 때 술 처먹고 오지 마. 그게 뭐야, 인마아! 올 때부터 해롱해롱하더니 택시 안에서 졸기나 하구.
- 으응? 내가 뭐?..
- 너 지금 그게 한두 번이야? 예전엔 안 그러더니, 요새 왜 그래 너! 매형 생일 때도 그렇고, 너 요새 가족들 모일 때 제정신으로 온 적 있어? 섀꺄! 오늘 같은 날 은우도 있고, 모처럼 재미있게 야구 보고 얘기도 좀 하려고 해도, 정신 못 차리고..
- 내가 무슨 정신을 못 차려?
민식 삼촌이 속상해서 하는 말을 술에 취한 막내 삼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 너 인마, 아까 야구장에서도 담배 피러 갔다가 의자에 앉아서 해롱대고.. 택시 안에서도 졸고 앉아 있구..
잠자코 지켜보던 민준 삼촌이,
- 됐어, 인마. 그만해! 형이 말하면 잘못했다고 하면 될 것 갖구 왜 그렇게 토를 달어! 형이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큰소리가 오가다가 민식 삼촌 입에서
- 몸도 성치 않은 새끼가..
라는 말이 나오자, 막내 삼촌이 눈물을 떨군다. 나는 삼촌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요즘 부쩍 취한 모습을 자주 보이시는 삼촌의 모습이 안타까워, 막내 삼촌에게 아무 위로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술잔을 들이키고 민식 삼촌을 거든다.
- 삼촌, 솔직히 저도 요새 걱정 많이 돼요. 부쩍 취한 모습 보이시고, 또 전에는 취하셔도 그닥 티가 안 났는데, 요샌 몸도 잘 못 가누시고.. 술 좀 줄이세요.
- 거봐, 인마! 은우도 그렇게 보인다잖아. 누나도 걱정 많이 하고. 이런 날 가족끼리 오순도순 재밌게 얘기하면서 술 한 잔 하면 얼마나 좋아! 근데, 너.. 너 얼마 전에 병원 갔다 왔다길래 걱정 돼서 전화했더니, 그때도 술 처먹고 있구!
무거운 분위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술잔을 들이켰다. 얘기가 정리되고 자리를 뜰 때 보니, 빈 소주병이 네 개다. 민준 삼촌과 막내 삼촌을 먼저 보내고, 민식 삼촌이 나를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 주신다.
식당을 나오기 전, 막내 삼촌에 대한 얘기가 끝나고 이어진 삼촌들의 화제는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는 한 손에 선물 세트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삼촌의 손을 잡고 말한다.
- 삼촌, 저 너무 걱정 마세요.
내 손을 꼭 그러쥔 삼촌은 내 얼굴을 보다가 입술에 붙은 딱지를 보고는,
- 으이, 이 섀끼..
나는 효진이랑 서진이는 걱정 안 해. 삼촌들하고 네가 더 걱정이야. 장가도 못 간 동생들하고 평탄한 길 놔두고 힘든 길 가는 네 놈..
숙모 없이 두 아들을 키우느라 힘겨운 시절을 보냈던 삼촌.. 이제 돌아볼 여유가 생기니, 또 다시 동생들과 조카 걱정이다.
- 은우야, 삼촌은 네가 실패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 소영이도 있고, 다시 일어서면 되지. 근데.. 네가 좌절할까 봐 그게 걱정이 돼. 그냥 모른 척하고 살아도 될 것들, 그거 다 품어 보겠다고 했다가 네가 받게 될지 모를 상처..
나는 웃으며 말한다.
- 삼촌 걱정 마세요. 저 꼭 할 수 있어요.
버스가 오고, 타고, 내가 자리에 앉아서 삼촌과 눈을 마주칠 때까지 삼촌은 자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버스가 출발하고 취기 오른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짐한다.
‘막내 삼촌의 전어, 민식 삼촌의 선물 세트, 민준 삼촌의 점심.. 소박하지만 울림이 담긴 삼촌들의 마음.. 그런 것들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에요. 그런 것들의 값어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삼촌..’
얼큰하게 취해서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자고 있고 아내는 불 꺼진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아내의 얼굴이 마음에 걸리는데, 식탁 위의 반찬통들이 보인다.
- 어머니 왔다 가셨어?
- 응.
- 무슨 말씀.. 있었어?
- 내가 일 나가면 어떻겠냐구.. 애들 봐주신다면서.
- ! 그래서?
- 나간다고 했지 뭐.
- 서운하지 않았어?
- 서운하지.. 그래도 어머니 이해해. 어머니라면 벌써 나가셨을 분이니까.
일 나가는 건 괜찮은데, 은지가 걸려서..
이제 세 살인데, 내년까지만이라도 더 있어 주고 싶은데..
나는, 마트에서 몇 개 담지도 않았는데 5만원을 훌쩍 넘기는 장바구니를 보며 느꼈던, 심지어 아이들 것조차도 가장 싼 제품만 골라 담으면서 미뤄 왔던 말을, 드디어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 내가 다시 일 나갈게.
해가 바뀌고,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새로운 직장에서, 나는 전보다 더 낮은 급여를 받으면서 더 먼 출퇴근 거리를 감수해야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보험을 깨야할, 금반지를 팔아야 할 일만큼은 없었다. 아내는 박봉을 탓하면서도 다시 안정을 찾아갔고, 큰애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9개월 만에 다시 일터로 돌아온 나를 보고.. 날개 꺾인 새를 보듯 자신의 일인냥 안타까워하는 친구도 있었고, 집을 팔고 일을 벌이지 않은 경솔함을 나무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렇게 결연한 의지로 시작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떡해서든 버텼어야지 겨우 9개월 만에 돌아올 거면서 그런 쌩쇼를 했냐며 비웃는 친구도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모질지 못한 성격과 아내의 부족했던 희생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 아쉬워하지 않았다. 집을 처분하고 일을 벌였다고 하더라도, 아내가 나 대신 돈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는 상황을 이기는 것은 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하늘은 나의 의지에 답하지 않으셨던가?.. 돌이켜보면,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사람들과의 소통에, 내 진심을 세상에 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2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오만이었다.
퇴근길에 큰애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아빠, 일 끝났어요?
- 네, 끝나고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왜요?
- 그럼 올 때 단팥빵 좀 사다 주세요.
- 왜, 우리 은설이 단팥빵 먹고 싶어?
- 네.
- 은지는 뭐 먹고 싶대?
- 은지는 나랑 똑같은 거 먹을 텐데~
- 아, 참 그렇지. 알았어, 은설아. 아빠가 맛있는 단팥빵 사 가지고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 응, 끊어요~
빵집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모카빵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단팥빵, 크림빵, 소보루빵을 쟁반에 담았다. 쟁반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데 베이글이 보였다. 베이글 이름이 ‘뉴욕의 아침’.. 문득 아내와의 결혼 10주년 약속이 떠올랐다.
‘3년 후, 나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 내가 뉴욕에서 베이글 향 맡는 거랑 자기가 몽골 초원에서 흙냄새 맡는 거랑 뭐가 다른데? 거기에도 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건 그냥 취향이야! 여자들의 허영심? 그래, 그래서 그런 꿈꾸는 여자들 중에 실제로 뉴욕에 가는 여자가 몇이나 될 것 같냐? 그런 꿈도 못 꾸니? 가 보지는 못해도 그런 꿈이라도 꾸면서 희망으로 사는 거야! 자긴 희망에 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제 비로소 개인의 취향을 인정하고, 그들의 꿈이 나의 꿈과 동등하다는 것을, 희망에는 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제 정말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상념을 떨치며 베이글 두 개를 집어 든다.
집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달려들며 빵봉투를 헤집는다. 봉지에 따로 싸인 베이글이 나오자, 아내가 베이글 봉지를 머리 위로 올리며 묻는다.
- 웬 베이글?
나는 아내가 언젠가 알게 될, 아니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를 글이라는 믿음에 대한 나의 불치병을 감추며 대답한다.
- 그냥.. 먹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