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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Read Beyond

총균쇠 (1) 지리가 문명을 결정했듯, 출신이 커리어를

by 조우성 변호사

[Read Beyond] 총균쇠 (1) 지리가 문명을 결정했듯, 출신이 커리어를 결정한다


승진 명단이 붙었다. 복도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름들이 빛났다. 전부 본사 기획실이었다. 창업주 친인척도 몇 명 섞여 있었고, 나머지는 서울대나 연고대 출신이었다. 지방 영업소에서 15년을 버틴 김 차장이 명단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에 무언가 무거운 게 깔려 있었다. / 실력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다른 땅에 서 있었던 것이다. /


# 안나 카레니나 법칙: 성공은 비슷하지만 실패는 제각각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꺼내든다. 톨스토이 소설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 문명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문명은 비슷한 조건을 갖췄지만, 실패한 문명은 각기 다른 구멍으로 무너졌다. 유라시아 대륙이 번성한 건 동서로 긴 축 덕분이었다. 같은 위도니까 기후가 비슷했고, 그러니 밀이나 말 같은 작물과 가축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지리적으로 운이 좋았던 거다. / 다이아몬드가 이 책을 쓴 건 인종주의를 깨부수기 위해서였다. 문명의 승패는 머리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땅에 발붙였느냐의 문제라고. /


# 2025년 대한민국, 지리적 운명론은 '수저 계급론'이 되었다


그런데 이 논리가 2025년 대한민국 직장인한테는 위로보다 냉소로 들린다. 내 연봉은 내가 얼마나 일 잘하느냐보다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가 결정한다. 승진은 성과보다 어느 부서에 처음 배치받았느냐가 판가름한다. 얼마 전 나온 기업분석 자료를 보니 지난 5년간 대기업 임원 증가율이 일반 직원보다 3배 넘게 높았다. 상위 자산 가구 출신들이 주요 자리를 싹쓸이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이미 좋은 땅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착각이다. / 우리는 환경 결정론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그걸 매일 체감한다. 지리가 역사를 결정했듯이, 출신과 소속이 개인을 규정한다. /


# 1만 시간보다 중요한 것: 그 시간을 쏟을 기회가 주어지는가


다이아몬드는 대륙의 지리를 설명했지, 개인이 어떤 땅을 고를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던진 화두가 바로 이거다. 성공하려면 1만 시간 노력해야 한다는 건 맞는데, 더 중요한 건 그 1만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느냐는 거다. 빌 게이츠가 천재여서 성공한 게 아니라, 중학교 때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마이클 샌델은 한 발 더 나간다. 능력주의라는 게 실은 실패자를 자기 책임으로 내모는 잔인한 신화라고. / 역사를 보면 개인의 의지보다 구조의 우연이 훨씬 강력했다. 문제는 이 진실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무기력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 /


# 땅을 바꾸는 것이 현대판 이주다


환경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 매몰될 이유도 없다. 유라시아가 번성한 건 땅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땅의 조건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 아닌가. 지금 직장인들한테 필요한 건 환경 탓이 아니라 환경의 전환이다. / 내가 서 있는 땅이 척박하면, 내 작물을 다른 곳에 심으면 된다. 이직이 현대판 이주다. / 커리어 피보팅은 새로운 기후대로 옮겨가는 거다. 성장하는 산업을 찾는 것,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것. 이게 지금 우리가 지리적 운명을 돌파하는 방법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오늘 성장 산업 리스트를 작성한다. 이번 주 안에 업계 네트워크 모임 하나에 나간다. 한 달 안에 링크드인 프로필을 다시 정비하고 이직 시장을 들여다본다. 작아 보이지만, 이게 땅을 바꾸는 첫걸음이다. 환경은 주어지지만, 어떤 환경을 선택할 건지는 여전히 당신 손에 달려 있다.


승진 명단을 다시 본다. 이젠 그게 운명이 아니라 정보다. 이 회사에서 승진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이제 알았다. 그 조건을 갖추려고 버틸 건지, 아니면 다른 땅을 찾을 건지. 선택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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