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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눈, 혹은 독재자의 광기

by 조우성 변호사

[조우성 변호사의 톡스토리] 미륵의 눈, 혹은 독재자의 광기


915년, 철원의 황궁에는 서늘한 바람만이 감돌고 있었다. 한때 부패한 신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던 영웅 궁예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는 절대 권력자만이 앉아 있었다. 그는 '관심법(觀心法)'이라는 전대미문의 통치 기술을 내세웠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이 주술적 논리는 사실상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무자비한 살인 면허였다.


《고려사》는 이 시기의 참상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궁예는 아내인 강씨와 두 아들을 처형한 것도 모자라, 기침 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신하를 철퇴로 쳐 죽이는 기행을 일삼았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켰고, 조정은 침묵했다. 그 칼끝이 2인자이자 태봉의 시중이었던 왕건에게 향한 것은 필연이었다. "그대는 반역을 꾀하고 있다. 나는 보았다." 궁예의 서슬 퍼런 추궁 앞에 왕건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때 왕건을 구한 것은 소년 참모 최응의 기지였다. "부정하면 죽습니다. 차라리 인정하고 용서를 비십시오." 최응의 붓 끝에서 나온 이 역설적인 조언은 왕건이 광기의 시대를 건너는 뗏목이 되었다. 왕건이 거짓으로 역모를 시인하자 궁예는 오히려 "정직하다"며 크게 웃고 그를 용서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궁예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동시에 왕건으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만든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기침 소리 하나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야만의 시대, 고려라는 새 시대는 그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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