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말들

by 조혜영

여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혹은 한 남자와 한 남자, 한 여자와 한 여자일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을 각각 A와 B로 칭해보자. A와 B는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다. 분명 서로에게 설렘 비슷한 걸 느끼지만 미묘한 사적 감정을 아직 꺼내 보이긴 싫은 상태. 상대를 향한 치밀한 탐색전과 수줍은 순수함이 공존하는 상태. 밀고 당기는 감정의 역동을 은밀히 즐기고 있는 상태.


그러던 어느 날, 가늘게 균형을 맞춰오던 관계에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은 공기를 통해 전달된 소리의 파동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른다.

깊은 밤, A의 집 앞. 작별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A가 불쑥, B에게 묻는다.


“라면 먹고 갈래요?”


A는 배가 고픈 걸까? 야심한 시각이라 라면 가게가 문을 닫아버린 모양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어도 될 텐데... A는 냄비에 보글보글 끓인 계란 탁, 파 송송 라면을 좋아하나 보다. 이제 결정권은 B에게 넘어갔다. B도 A처럼 배가 고플까? 컵라면 대신 냄비라면을 먹고 싶을까?

예상했듯이, 이런 장면에서 대부분 B도 배가 고프다. B가 냄비라면을 좋아할 확률은 99.9%다. 그건 실제 B의 위장 상태와 라면 취향과는 무관한 선택이다. ‘라면’을 이야기하는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라면’은 없다. 과연 A와 B, 두 사람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14110210A87DF422A1.jpg 영화 <봄날의 간다>의 한 장면 (출처:다음 영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 분)가 상우(유지태 분)에게 한 대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썸에서 연애로 넘어가는 단계, 애매모호한 관계에 균열을 내는 말 중 가장 클래식하다고 할까. 엄밀히 말하면, 영화 속 은수의 말은 "라면 먹을래요?"다. 어쩐지 "라면 먹을래요?"보단 "라면 먹고 갈래요?"가 더 강렬하다. 스크린 안에 갇혀있던 영화 대사가 대중들의 입과 입을 거치며 생명력을 얻은 결과다. 내가 너에게 라면을 먹자고 한 것은 배가 고파서일 뿐이지 절대 다른 뜻은 없다는 듯, 라면만 먹으면 바로 집에 보내줄 것처럼 무심히 던지는 말...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사실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에는 이런 속내가 숨겨져 있다.


"설마 라면만 먹고 그냥 가지는 않겠죠?" "라면 먹고, 절대 가지 마요!"


소주잔을 앞에 두고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속삭이던 배우 정우성의 말처럼, 라면 먹고 가면 이제 우리 사귀는 것임을 A와 B는 알고 있다. 이제부터 A와 B 사이에 라면은 거들뿐이다. 실제 영화에서도 냄비에 물을 끓이며 생라면을 깨물어 먹는 은수의 모습만 보일 뿐 두 사람이 라면을 먹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왜 라면일까? 라면이 아닌 음식들을 떠올려본다. 햄버거, 떡볶이, 김치찌개, 피자, 치킨, 육개장, 돈가스, 짜장면...


( ) 먹고 갈래요?


( ) 안에 다른 음식을 넣어보자. 햄버거 먹고 갈래요? 떡볶이 먹고 갈래요? 김치찌개 먹고 갈래요? 치킨 먹고 갈래요? 일단 집에서 간단하게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저것 재료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배달을 시키거나. 배달은 꺼려진다. 배달된 음식이 오기까지 최소 몇십 분에서 최대 1시간 동안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게다가 김치찌개나 육개장은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음식이 아니다. 오래된 연인들의 음식 같은 느낌. 음식 대신 술은 어떤가? "맥주 한잔 하고 갈래요?" 어쩐지 좀 노골적이다.


그에 비해 라면은 친근하다. 부담이 없다. 웬만한 집에 늘 구비되어 있는 음식이며, 쉽고 빠르게 끓일 수 있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스프를 넣으며 초반의 어색함을 자연스레 넘길 수 있다. 면은 어느 정도 익히는 걸 좋아하는지... 꼬들꼬들한 걸 좋아하는지, 푹 익은 걸 좋아하는지? 계란을 그대로 넣는 걸 좋아하는지, 노른자를 풀어서 넣는 걸 좋아하는지? 이런 소소한 취향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라면은 익게 되어 있다.


라면을 다 먹을 즈음에는 얼큰한 국물 때문인지 혹은 긴장 때문 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작은 땀방울이 서로의 인중에 맺히고... 둘의 거리는 한층 가까워져 있다. 물론 라면을 먹은 후에도 애매모호한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오늘부터 1일'이 아닌 '오늘부터 남'이 될 확률도 언제나 존재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라면으로 맺어진 관계가 라면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인스턴트 라면이 익는 시간만큼이나 연애의 절정도 한순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라면 먹고 갈래요?"는 관계를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의 말이다.


요즘엔 영어 표현을 빌려 "넷플리스 보고 갈래?"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하지만 라면만 못하다. 역시 클래식은 진리다. 나트륨도 많고 다이어트엔 금물인 천덕꾸러기 라면이지만 나는 라면을 거부할 마음은 없다. 삶은 유한하고, 꽃은 지고, 봄날은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비정한 날들 가운데, 우리에겐 늘 라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