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말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길 바란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고 재미없더라도 잠깐이면 된다. 참고로 연애 이야기는 아니다.
옛날에 어떤 남자가 군대에서 쫄병이랑 야간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독한 방귀 냄새가 나더란다. 남자는 코를 틀어막으며 옆에 있는 쫄병에게 물었다.
"야 새끼야, 너 방귀 뀌었지?"
그러자 쫄병이 말하길,
"저 방귀 안 뀌었는데요. 왜 자기가 뀌어 놓고 저한테 뒤집어 씌우세요?"
"네가 뀌었잖아. 난 방귀 안 뀌었어, 짜샤."
대체 누가 방귀를 뀌었냐는 문제로 옥신각신 하다 날씨도 춥고 해서 두 사람은 내무반으로 그냥 들어갔다. 그런데 남자가 내무반에서 막 잠이 들려는 찰나, 그 쫄병이 진지하게 다시 말을 꺼내는 거다.
"저 아까 진짜 방귀 안 뀌었습니다..."
남자는 심각하게 궁금해졌다. 방귀를 뀐 사람이 누구인지. 왜냐하면, 남자 자신도 진짜 방귀를 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 찐한 냄새는 실제였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후, 비로소 남자는 초소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예전에 그 부대에서 근무하던 병사 하나가 죽은 애인을 따라 자살한 곳이 바로 그 초소였다는 것. 그리고 그 병사가 평소에 그렇게 방귀를 많이 뀌어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다.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준 당신에게 먼저 감사를 전한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신에게 무섭거나 떨리거나 설레는 감정이 일어나진 않았으리라. 군대에서 귀신이 방귀 뀐 이야기에 설렘을 느끼다니 그건 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종종 일어나곤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막 사랑을 느끼게 된 상대라면 말이다.
한번 상상해보자. 당신에겐 언젠가부터 자꾸 보고 싶고, 연락하고 싶고, 맛있는 거 같이 먹고 싶고, 놀이공원에도 함께 가고 싶어 진 사람이 있다. 가수 윤종신의 노래 <환생> 속 주인공처럼 '할 때도 안 된 샤워를 하게 하며 관심 없던 꽃가게에서 발길을 멈추게 하고 모진 이 세상도 참 살아갈 만 하구나' 느껴지게 만드는 단 한 사람. 그 사람과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날따라 가로등도 고장 난 야심한 골목, 당신의 오른쪽 손등과 상대의 왼쪽 손등이 깻잎 한 장 차이로 닿을 듯 말 듯... 금방이라도 상대의 손을 붙잡고 싶은 당신이지만 마음과 달리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당신과 상대의 손등 사이 1mm의 공간으로 차가운 밤 공기만 아슬아슬 흘러가고 있을 때, 상대가 갑자기 입을 연다.
"옛날에 군대에서 내 바로 밑에 쫄병 하고 같이 보초를 서고 있었거든..."
남녀 사이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건 바로 군대 이야기라고 하지만, 때로 어떤 사이에 이야기의 소재와 주제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지루한 이야기도 재미있어지고 어떤 썰렁한 이야기도 스릴 넘치게 만드는 마술 같은 순간, 전문용어로 우리는 그런 상태를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말한다.
입김과 함께 시작된 상대의 말이 차가운 밤공기를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게 앞서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지고... 나에게 들을 때의 심드렁했던 느낌과 달리,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상대가 타고난 이야기꾼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대체 '그 방귀는 누가 뀐 것이지, 설마 혹시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두려움이 몰려올 때쯤 어느새 당신은 상대의 팔짱을 꽉 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이 상대의 팔짱을 끼던 그 순간, 움찔 놀란 상대는 살짝 말을 더듬었을지도 모른다.
왜 내 이야기에는 두려움은커녕 무슨 실없는 이야기냐며 콧방귀를 뀌던 당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두려움을 느끼며 팔짱까지 끼었는지 묻고 싶지만 절대 묻지는 않겠다. 그 정도는 눈 감고 지나쳐줄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작은 감정도 부풀려 과장하고, 알던 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연상 후보들 아니던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심은하 분)과 정원(한석규 분)의 첫 스킨십은 그렇게 귀신이 방귀 뀐 이야기로 시작된다(정원의 오토바이를 탄 다림이 정원의 등을 붙잡던 장면을 제외하고). 놀이공원을 다녀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한 두 사람이 대중목욕탕에서 나와 귤을 까먹으며 밤길을 걸어가던 그 장면... 아쉽게도 영화 속 다림과 정원의 첫 스킨십은 마지막 스킨십이 되었지만 그 날의 방귀 이야기는 강렬하게 남아있다.
언젠가 다림은 세상사는 게 참 시시하다는 듯 정원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아저씬 사는 게 재밌어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정원에겐 아픈 질문이었겠지만 정원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냥 그렇고 그래..."
세상 사는 게 시시하고 쓸쓸해질 때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어 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영화 <500일의 썸머>의 남자 주인공 톰(조셉 고든 레빗 분)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랑에 빠졌어. 그녀를 생각하면서 듣는 노래도, 그녀가 주는 모든 느낌...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한 마디로 세상 사는 맛이 나..."
톰의 말에 비록 친구 폴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지만.
"상태 심각하네."
낭만적인 사랑은 일종의 환각이다. 깨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상태라고 할까. 어쩌면 톰 친구 폴의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어린 시절 친구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초등학교 운동장에 앉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버지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단다.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 버릴 시시하고 쓸쓸한 삶 한가운데,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유치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그 어떤 이야기라도 흥미진진하고 스펙터클 한 스릴 넘치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모든 사랑에도 반전은 있고 끝은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