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말들
사랑에 빠졌던 최초의 순간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언제 사랑에 빠지는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전에 '빠지다'라는 동사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같은 의미의 영어 표현 'fall in love'에서도 'fal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빠지다'라는 단어가 흔히 쓰일 때는 '물에 빠지다' 정도가 될 것이다. 누군가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는 장면을 슬로우 화면으로 천천히 돌려본다고 상상해보자. 공중으로 붕 떠올랐던 몸의 일부가 물 위 표면에 먼저 닿는다. 어떻게 뛰어내리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발바닥이나 정수리, 얼굴 등이 물에 닿으면서 차가운 물의 온도가 촉각으로 느껴질 것이다. 짜릿한 느낌이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보던 지상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속으로 빨려 들 듯 미끄러져 들어간다. 물속 세상에서는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고 물체가 흐릿하게 보이며 숨도 잘 쉬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이빙 장면을 상상하고 보니 사랑에 빠지는 경험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상대가 수영장이 되는 거다. 대신 내 몸이 상대를 향해 뛰어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상대를 향해 뛰어든다. 시각이든 후각이든, 청각이든 촉각이든 감각이 제일 먼저 느껴진다. 얼굴이나 비율, 옷 입은 스타일 같은 시각적 자극이 마음에 와 닿을 수도 있고,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는 목소리나 노래 부르는 목소리가 귓속 달팽이관을 거쳐 마음에 닿을 수도 있다. 향수 냄새나 비누 냄새 같은 후각적 자극도 마찬가지다. 사람 많은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진 채 느끼는 상대의 호흡, 그 호흡이 내 뺨 살갗에 내려앉는 자극은 또 어떤가. 그렇게 첫 감각과 함께 우리는 상대 속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어진다. 마치 물속 세상에서 허우적대듯이...
그런 의미로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에서 셀린(줄리 델피 분)이 제시(에단 호크 분)에게 마음을 뺏긴 상태를 설명하며 이렇게 표현한 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난 덫에 빠졌어."
셀린은 자신이 제시에게 홀딱 반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차 휴게실에서 자기 얘기를 해주는데, 어릴 때 증조할머니 유령을 봤다는 거야. 그때 홀딱 반해버렸지.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품은 꼬마 애를 상상해봐..."
여기서 우리는 연애 꿀팁 하나를 포착해낼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반하게 하려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라. 단, 그 어린 시절 이야기의 장르는 반드시 판타지 동화여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본격적으로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셀린을 홀딱 반하게 만든 제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게 어린 시절은 마법의 시간이었어, 정말이야...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족이 모두 플로리다에 갔을 때였어. 내가 3살인가 3살 반인가 그랬을 거야. 그때 난 뒤뜰에서 놀고 있었어... 그거 있잖아, 햇빛에 물 뿌리면 무지개 생기는 거. 그걸 하고 있었는데, 그때 물안개 너머로 증조할머니가 보이는 거야. 저기 서 계시더라고, 나한테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야. 난 할머니를 보면서 호스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지. 그러다 마침내 호스를 놔버렸어. 그러자 호스는 떨어지고 할머니는 사라졌지..."
나 역시 제시가 기차 휴게실에서 증조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 묘한 감정의 일렁임이 있었다. 만일 셀린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다면 나 역시 덫에 걸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셀린과 내가 남자에게 반하는 지점이 같아서일까. 이제 왜 우리가 연애할 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판타지 동화로 각색하여 상대에게 들려줘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하려 한다.
소년에 대한 두 개의 노래가 있다. 하나는 'A Great Big World'의 <When I was a boy>, 다른 하나는 '몽니'의 <소년이 어른이 되어>이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난 꿈이 있었다고, 침대에 눕자마자 머릿속에서 음악이 연주되었다고 말하는 전자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반면, 후자는 순수했던 소년이 어른이 되어 느끼는 현실의 서글픔을 드러낸다. 나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지만 한동안 이 두 노래에 감정을 이입하곤 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어른이 되어 이미 흐릿해진 어린 시절 꿈의 한가닥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러다 어느 날, 한 얼굴을 보았다. 이미 비정한 어른의 세계에 속해있지만 한 때 소년이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어떤 얼굴을... 깊은 시각적 감각이 내 마음에 차가운 수영장 물처럼 와 닿았고, 잠시 서늘해졌던 마음에 햇빛 사이 무지개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때 난 알았다.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실제로 겪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 판타지로 각색하는 것이 허락된 세계다.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도 그때의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인지 모른다. 현실이 판타지가 되는 세계, 다시 소년이 되고 소녀가 되는 판타지... 순수로의 회귀 말이다. 사랑에 빠질 때 현실은 4D 영화보다 더 생생한 판타지가 된다.
이제 셀린과 제시의 대화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 밤, 당신의 어린 시절을 한번 떠올려보길... 마법 같은 작은 씨앗을 발견한다면 그 이야기를 각색해 부풀려보길... 그리고 그 이야기가 상대를 꼬시기 위한 얕은 전략이 아니라 순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되길...
제시 : "마치 꿈속의 세계와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셀린 : "우리가 우리 시간의 주인인 것 같아. 우리의 우주 같다고. 난 네 꿈속에, 넌 내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제시 : "진짜 멋진 건, 우리가 함께 보낸 이 저녁이 꼭 존재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거지."
셀린 : "맞아. 그래서 초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나 봐. 하지만 아침이 오면 우린 모두 호박으로 변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