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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un 19. 2021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별 일 없이 잘 지내다가도 문득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습관처럼 밀려온다.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사로부터 몇 걸음 비켜나 나만의 은신처에 조용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다. 사실 이런 마음이 들 때는 별 일이 없는 게 아니다. 별 일이 생긴 것이다. 무언가가 불편하고 싫어진 것이다. 그럴 때 난 세상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방법 외에 적당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곤 했다.


'별 일'은 대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그러니 무언가 불편하고 싫어졌다면 그 대상 역시 사람일 확률이 높다. 나에게 세상은 곧 사람이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곧 불편하고 싫은 사람을 피하고 싶은 간절함이다. 숨통을 조여 오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은 생존의 마음이다.


숨통을 조여 오는 사람은 대개 이런 부류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조종하려는 사람, 자신이 가진 지위를 활용해 막무가내로 월권을 행사하는 사람, 자신의 불안을 나에게 투사해 문제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리는 사람, 원칙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리더 혹은 불필요한 디테일에 집착해 자기만의 원칙을 강요하는 리더... 보통은 한 사람에게서 이 모든 특징들이 발견될 때가 많았다.


사회생활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가슴께가 답답해지며 소화가 안 되는 증상을 겪곤 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벌렁거린 적도 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들이 무서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신보다, 동물원이 아니라면 볼 일 없는 맹수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다 버티기 한도가 초과되는 날에는 관계를 끊고 도망쳤다. 도망쳐서 꼭꼭 숨어버렸다. 나만의 방공호에 몸을 숨긴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도망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득 보다 실이 많은 편이다. 마음은 편안해졌지만 실리는 별로 없었다. 어렵사리 들어간 학교나 모임을 포기하기도 하고,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놓치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또한 제 발로 차 버리는 꼴이 되곤 했다. 도망침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던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원점이 아니라 퇴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무능하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까웠고 제자리걸음인 내 삶이 부끄럽고 초라했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방공호에서 잠깐은 안전하고 평화로웠지만 마실 물과 먹을거리도 슬슬 떨어져 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 도망쳤지만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어차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나이는 먹어가고, 모아 놓은 돈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었다. 맹수를 피해 도망치다 다다른 곳이 벼랑 끝이었다. 뒷걸음질 치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느니 달려드는 맹수와 호기롭게 한 판 싸우다 강렬히 전사하는 편이 덜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어! 제 발로 먼저 물러서거나 회피하지 않겠어! 눈을 크게 뜨고 두 발로 버티면서 좀 더 현명한 해결책을 찾아보겠어! 그것만이 내가 만든 방공호에서 빠져나와 진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다짐하는 순간, 에너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적극적이면서 도전적인 태도가 자라났다. 굳이 공격적이거나 전투적이지 않아도 관계의 주도권을 내 쪽으로 가지고 오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작은 비법이라면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줄 수 있는 것의 접점을 맞춰가는 방식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갖고 있지 않은데 억지로 쥐어 짜내서 줄 필요도 없고, 내가 줄 수 있다고 해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까지 줄 필요도 없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걸 상대가 원할 때는 정중히 줄 수 없다고 말하기. 상대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부당하다 느껴질 때는 당당히 거절하기.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지 한두 번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진다고 하는데, 아직은 매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용기를 낸다. 때로 태도가 정중하거나 당당하지 못할 때도 있다. 참았던 화가 터져 나와 먼저 흥분하기도 하고,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버벅대며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구 끝까지 도망치고 싶지만 꾹 참고 버틴다. 나에겐 도망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지만, 어차피 도망쳐봤자 벼랑 끝이거나 악어떼가 입을 벌리고 있는 늪일 테니까. 차라리 지금 여기에서 단판을 보는 편이 더 낫다.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도망치지 않겠다 다짐을 한 이후로, 숨통을 조여 오는 부류의 사람들을 확실히 덜 만났다. 대단한 결의도 아니었는데, 작은 결심의 힘이 마치 모기향 같은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피를 빨아먹으려 달려드는 모기들을 멀리 쫓아버렸으니 말이다. 피를 빨아먹을 만한 사람 옆에 모기들도 꼬이는 법이니까. 그동안 내가 너무 나약해서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었나 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모기향 따위 끄떡하지 않는 대왕 모기들은 어디든 있다.


피를 빨아먹는 쪽이나 도망치는 쪽이나 결국은 둘 다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생존은 본능인데, 생존의 방식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살아남는 게 공통의 목표라면 남의 피를 빨아먹지도 않고도, 도망치지 않고도, 서로 손 맞잡고 함께 살아남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유토피아에도 있을까 말까 한 이상적인 방법이나 찾고 앉았다가 또다시 대왕 모기에 물어 뜯기려나.


따지고 보면, 어느 일본 드라마 제목처럼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바로 도망치다가 깨달으니 말이다. 살면서 또다시 숨통이 조여 오는 일이 생긴다면 도망을 거부하진 않으련다. 어떨 때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무조건 빠르게 도망쳐야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다만, 도망치다 만난 절벽 끝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순발력과 악어 떼가 가득한 늪 앞에서 여유롭게 유턴할 수 있는 유연성 정도는 길러두어야지. 부끄럽지만, 도망치든 싸워서 이기든,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고 싶으니까.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도망은 두려움을 외면하는 도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때를 기다려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웅크림, 더 높은 발돋움을 위한 자발적 후퇴. 그 어떤 전진보다 매력적인 도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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