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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un 15. 2021

인생의 라스트 씬


어슴푸레 해가 내려앉는 저녁 무렵이면 가슴 한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바쁘게 움직일 때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평화로워질 때, 베란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저녁 공기에 그만 코끝이 시큰해지고 만다.


지극한 행복을 상상하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잔잔한 슬픔의 감정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가슴 아픈, 고통의 슬픔은 아니다. 충만한 슬픔, 희열의 슬픔, 감사의 슬픔이랄까. 그것은 흡사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살아낸 자가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행복, 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한한 우주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충만함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오랜 시간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공포감이 밀려왔다. 생각하고 느끼고 움직이던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니...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불현듯 나의 죽음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명백한 현실로 자각되던 날, 두 발이 지하철 바닥에서 붕 떠올라 죽은 영혼이 되어버린 듯한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다.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불쑥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모든 것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다가도 조금만 힘들어지면 '어차피 죽을 건데, 다 의미 없어'라는 생각과 함께 허무감이 찾아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보기 위해 선택한 것은 불교 공부였다. 붓다의 가르침 안에 생과 사를 뛰어넘는 진리가 있다는데, 그것을 깨닫는다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궁극의 깨달음은 아직 요원했지만 죽음이 있어 삶이 허무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의미 있어짐을 알게 된 어느 날, 다큐멘터리 취재 차 축서사 무여 스님을 뵙게 되었다.    


평생 참선수행에만 매진하며 살아온 스님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신지 물었다. 꿈이라는 단어는 속세를 사는 범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일지 모르지만, 혹시 산중에 사는 스님에게도 꿈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내 인생의 라스트 씬을 늘 꿈꿔요."


인생의 라스트 씬? 영화의 라스트 씬 말고 인생의 라스트 씬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스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내 인생의 라스트 씬은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다가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툭 떨구는 것이에요."


스님은 그 모습을 행동으로 묘사했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꼿꼿하게 세워진 척추 그대로 목에만 힘이 빠진 채 아래로 떨구어지는 모습이었다. 마치 스님의 라스트 씬을 실제로 직접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죽음의 순간,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뜰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평생 동안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그대로 말해준다. 모든 순간을 참선하듯 살아온 스님에게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매 순간을 어지럽게 살아온 사람이 죽는 순간 갑자기 평화로워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에 나오는 츠바타 슈이치 할아버지의 죽음도 인상적이었다. 늘 평소와 같이 제초작업을 끝내고 낮잠을 주무시던 구십 세의 할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카메라는 잠을 자듯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보여주었다. 시신을 보고 있음에도 소름이 끼치거나 무섭지 않았다. 츠바타 슈이치 할아버지의 라스트 씬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함 그 자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 속 츠바타 슈이치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 (출처:다음 영화)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평생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채 어떤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방랑하며 살아온 크눌프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인생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훌륭한 인간도 되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크눌프에게 하느님은 말한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 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이제 더 한탄할 게 없느냐?... 그럼 모든 게 좋으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그렇게 크눌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빛나는 태양 속에서 잠을 자듯 인생의 라스트 씬을 맞이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어리석었던 시간들 마저도 신에게 이해받은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죽음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허무감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제대로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한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파니 핑크>에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주인공 파니 핑크는 죽음의 과정을 연습하는 강좌를 들으며 자신의 관을 짜서 방에 둔다. 하지만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됐을 때 그 관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마음껏 사랑하며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죽음이라는 관념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기본값이다. 소크라테스도 죽었고, 붓다도, 예수도 다 죽었다. 대단한 성자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죽음이 나에게만 예외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또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쓸데없이 죽음을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말해주듯, 죽음을 '걱정하는' 삶은 두려움으로 채워지지만 죽음을 '기억하는' 삶은 매 순간 의미와 기쁨으로 채워진다.

    

이제 예전만큼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아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죽음이 내 일상을 방해할 만큼 공포스럽지 않은 건 사실이다. 물론 이왕이면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삶의 기쁨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다. 내 인생의 평화로운 라스트 씬을 위해 살아있는 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인 나바호족의 말처럼 말이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대지를 뚫고 환하게 떠오르는 태양도 아름답지만 어둠 속으로 서서히 녹아드는 저녁노을 또한 경이로운 장관이다. 땅거미 지는 저녁의 고요와 평온을 더 충만히 느끼며 살아가야겠다. 마지막 날숨을 허공 속으로 내려놓는 그 순간, 감사와 평화와 축복의 눈물이 그대와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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