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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un 25. 2021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늘 애를 썼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낯선 장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일을 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매번 입사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는 느낌이었다. 과도하게 애쓴 탓에 목과 어깨가 딱딱해지곤 했다. 


경력이 많이 쌓이기 전, 사회생활 초기 때는 함께 일하는 PD나 클라이언트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쉽게 말하면 일 못 한다고 무시받지 않기 위해 애썼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서부터는 믿고 맡겨주는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름값을 하기 위해, 받는 돈만큼의 몫을 하려고 애썼다.


이러나저러나 애를 쓰며 살아온 인생이다. 직업인으로서 그 정도의 애씀은 마땅한 책임감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애씀의 균형점을 생각한다면 평균에서 멀리 나아간 느낌이다. 말이 애씀의 균형점이지, 저울로 재듯 딱 떨어지는 지점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일을 '하는' 내가 느끼는 지점과 일을 '맡긴' 상대가 느끼는 지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을 할 때의 육체적, 심적 피로도를 과학적 수치로 측정하여 어느 수치를 넘어서는 순간 '삐'하고 경보음이 울린다면 어떨까. 자, 이제 애씀은 여기까지. 더 이상 애쓸 필요 없습니다. 위로하듯 따뜻한 목소리의 안내음이 함께 나와준다면 안심하고 노트북 전원을 꺼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맡은 일을 잘 해내려는 마음,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건강한 수준의 프로 의식은 분명 권장할만한 덕목이다. 문제는 프로 의식으로 교묘하게 위장된 보상심리다. 애씀의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깊은 뿌리에 열등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스스로 결핍됐다 여기는 부분을 과도하게 메꾸려는 의지가 늘 문제의 주범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은 마음, 완벽하게 해내려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들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과장된 의지에서 비롯된다.   


일의 시작 단계에서 항상 애를 썼던 이유는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어 처음 일하는 PD 혹은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짠'하고 나의 존재감을 보여주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략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애씀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을 확률은 늘 있다. 좋은 피드백을 받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일 뿐이고 상대의 마음은 다를 수 있다. 상대의 선택과 판단까지 내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의 차이일지라도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을 때는 마음이 상한다. 본래의 의도, 그러니까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 스텝에서는 더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빠져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제 발로 걸려드는 꼴이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운이 좋아 좋은 피드백을 받았더라도 기쁨은 잠깐일 뿐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애씀'의 필연적 속성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오랜 시간 동안 애를 씀으로써 에너지를 바닥까지 소모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씀'은 그 안에 '부족함'이라는 어둠을 품고 있다. 애씀과 부족함은 한 세트이다.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부족한 자신을 만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으로 빠져들고 만다.


과도하게 애쓰지 않으려면 잘해서 예쁨 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움받을 용기까지는 없더라도 예쁨 받으려는 욕망은 내려놓자.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기 때문에 예쁨 받고 싶은 것이다. 나는 타인에게 예쁨을 확인받아야만 비로소 예뻐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존재 자체만으로 유일무이한, 예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예쁜 존재다. 


그러니 이제 애쓰지 않으련다. 애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대충 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잘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 낸 불필요한 힘을 빼고자 함이다. '잘 해내야만 해'라는 생각을 상쇄시키는 말로는 '못해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같은 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언젠가 잘 못하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괜찮아지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잘 못하고 실수한다고 생각하면 더 불안해진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다짐은 현재로서는 말뿐인 거짓 위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도 쉽지는 않다. 할 수 있는 만큼이 어느 정도인지 측청 불가능할뿐더러, 적당히 해놓고서 이 정도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대치라며 핑계를 댈 게 뻔하다. 


애쓰지 않는 마음을 갖기 위한 내게 최적의 말은 '즐기면서 해, 놀듯이 해' 같은 말들이다. 놀이처럼 즐기는 것이라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놀이라면 애초에 애를 쓴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리 없다. 어린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고 숨을 헐떡거려도 좀처럼 애를 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공룡을 좋아하는 어린 조카는 애쓰지 않아도 그 어려운 공룡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다. 보고 읽어도 발음이 쉽지 않은 이름을 술술 말할 때마다 조카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나의 조카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은 모두 천재다. 애쓰지 않고도 하루를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놀이의 천재들. 놀이를 시작하면서 잘 논다고 칭찬받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못 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없고, '내가 친구들 중에 제일 못 놀아' 하는 열등감도 없다. 그렇다고 적당히 대충 놀지도 않는다. 그냥 마음이 꽂히는 그것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몰입할 뿐이다.

결국 자신의 예쁨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애쓰지 않고도 놀듯이 즐기며 자신의 베스트를 다할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애쓰지 말자고 세게 외치고 있는 걸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애쓰지 않기 위해 또 애를 쓰는 모양이다. 애씀의 강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시스템은 아니지만 나름의 바로미터가 있긴 하다. 목과 어깨의 경직 상태가 일종의 경보음이다. 목과 어깨가 서서히 굳어오는 걸 보니 애씀은 여기까지. 이제 글쓰기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과감히 노트북 전원을 끄고 시원하게 스트레칭이나 해야겠다. 오늘의 글쓰기는 끝, 평생의 애쓰기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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