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 보면서 난 자꾸 일과 조직에 대해 생각했어
1. MBC의 개막식 방송 참사. 출전국을 소개하는 화면에서 부적절한 이미지와 자막이 사용됐다. 맥락과 본질에 대한 철저한 무지가 낳은 참사를 보며, <톡이나 할까>의 권성민 PD님이 퍼블리와 진행한 인터뷰가 기억났다. 요즘은 프로그램이 사소한 자막 하나 때문에도 문을 닫을 수 있기 때문에, 그걸 거를 수 있는 ‘예민함과 안전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도 PD의 능력이라 생각한다고.
요즘은 너도 나도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이기 때문에, 콘텐츠를 참신하게 찍어내는 것을 넘어 더 큰 맥락을 이해하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따라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제작자의 더 중요한 자질이 된 것 같다. 사실 MBC 사례의 경우는 충분히 예민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1차 필터링도 안 된 참담한 수준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만.
2. 밤새도록 경기 중계를 지켜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뉴스 하이라이트 수준으로만 챙겨보게 됐다. 직장을 오래 다닐수록 승패가 명확하게 나눠지는 스포츠 게임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게 정신적으로 좀 힘든 일이 되었다. (우리 국가대표가 아니더라도 패자에게 너무 강한 연민을 가지는 성격도 문제이고.)
3. 그래서 이번 올림픽에서는 스포츠 기준에선 명백한 ‘실패’의 순간이지만 미소를 보였던 선수들의 얼굴을 마음 속에 수집해 두게 되었다. 그 아쉬움의 미소들은 내 기분을 편하게 하는 길티플레저 같은 것. 나도 최선을 다 했다면 마지막엔 웃는 사람이 되고 싶다.
4.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문득 ‘스포츠 심리학’이 궁금해졌다. 이번 올림픽에서 특히 중요하게 떠오른 선수들의 정신 건강 문제도 그렇고, 선수들의 불안을 다스리는 트레이닝 방식, 승리를 이끄는 마인드 트레이닝, 동기부여하는 방식, 팀워크를 이끄는 방식 등등… 경기 결과에는 선수 개인의 신체적 기량보다 훠얼씬 더 큰 무언가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스포츠 경기가 화면 위에 보이는 선수와 코치 몇 명 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5. 한국 양궁협회가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방식이 너무나 투명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탤런트를 어떻게 선발하는지에 대한 조직의 철학과 운영 방식만으로도 조직의 성공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일하는 사람으로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6. 이번에 유일하게 생중계로 지켜본 경기가 여자 배구 마지막 두 번의 경기였다. 김연경 선수가 개인적으로는 이번 올림픽을 마지막 국가대표 무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였다. 뉴스 하이라이트를 통해 경기의 ‘결과’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 김연경이 경기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일잘러가 어떻게 일을 잘하는지 그 전체 프로세스를 안방에서 볼 수 있는 건 대단한 선물 아닌가?! 그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게 되자 놓칠 수 없었다. 내가 본 브라질전 & 세르비아전 경기는 처음부터 둘 다 승산이 크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도 패했다), 결국 나는 김연경이 ‘어떤 과정으로 패배를 할까?’, ‘패배를 직감했을 때도 어떤 식으로 끝까지 이어갈까’를 같이 지켜봤다고 해야겠다.
7. 여자 배구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것. 팀원들을 다독거리며 “차분하게, 하나야”라고 말하던 김연경의 멘트. 격차가 너무 아득할 때, 일의 끝이 너무나 안 보일 때, "일단 이거 하나만 하자, 그리고 끝나면 그 다음에 또 하나 하자." 이렇게 당장 눈 앞의 한 가지 과제만 집중하는 마인드가 나한테도 너무 필요해서... 그 장면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8. 일본은 언제부터 지금의 일본이 되었을까? 내가 청소년일 때만 해도 분명히 일본 문화를 선망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 1020 세대들에겐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을까.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백신을 확보했는데도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날로그적 국가 시스템 때문이라고 하는데, 난 그걸 2018년에 다녀온 도쿄 여행에서도 여실히 느끼게 됐다. 혼자 간 여행에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과 지갑이 든 손가방을 통째로 분실했는데, 무엇보다 나를 가장 패닉 상태로 만든 건 일본의 행정 시스템이었다. 우리나라 상황을 상상하고 경찰에 한 번만 신고하면 통합전산망 처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이 나라는 아니었다. 공항 분실센터, 공항철도 분실센터, 도쿄시 분실센터, 도쿄도 분실센터, 각 지하철 노선별 관리 회사 3-4군데에 모두 연락을 해두어야 했다. 매일 10군데 가까운 곳에 몇 시간에 한 번씩 전화를 돌리면서, 수화기 너머 이들의 목소리에서 무기력에 가까운 국가 정서를 느꼈다. 친절하지만 무능한 느낌, 그게 또 개인의 무능이라기보다 시스템의 무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도 내 가방을 훔쳐가지 않고 분실센터에 맡겨준 것을 알게 된 이후론 ‘역시나 친절한 일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찾아내는 데 2박 3일이 걸려버린 경험 때문에 그 이후로 나의 일본에 대한 로망은 모두 식어버렸다. 아주 아주 차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