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추억이 깊이 새겨진 장소를 의도치 않은 순간에 만나는 경우가 있다. 바쁘게 사느라 까먹고 살지만 맘속에 남아 잊혀지진 않는 그런 공간 그리고 순간. 오늘 아침 각시랑 애기 밥멕이러 숙소 근처 보말칼국수 맛집에 갔는데 그 옆에 왠지 낯이 익은 카페가 하나. 계속 그쪽으로 눈이가 속으로 저기 어디지...저기 어디지.. 계속 생각하다 갑자기 번뜩 "어?! 저기 거긴데?? 여기 거긴데!!". 너무나 반가운 기억이 갑자기 맘 속 깊은 곳에서 부터 떠올라 "우리 밥먹고 저기 가자. 얼른 저기가자". 한 십몇년 전 쯤 이었을까, 혼자 올레길을 20코스부터 1코스까지 한바퀴 다 돌던 패기넘치던 그때. 몇일간 네 코스를 돌고 다리가 아파 좀 쉬고 싶었는데 진짜 거짓말 처럼 딱 나타난 카페 '커피가게쉬고가게'. 아직 가오픈 중이어서 어수선 하지만 원하면 쉬고가라고 하시기에 잠깐 앉아 제주 녹차라떼 한잔 시키고 책꽂이에 있던 책한권 꺼내고. 그땐 스마트폰이 있던 사람이 더 적던 때라, 그냥 지친 다리 회복될때 까지 자리에 앉아 쉬기가 넘 심심해 책을 폈을 뿐인데 와.... 이거 너무 재밋는거야. 서명숙작가님이 산티아고순례길을 걷다가 제주에 이런 길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이곳에 내려와 올레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담은 책인데 이거 진짜 너무 재밋는 거지. 너무 흥미롭고 재밋어 하루를 그곳에서 자고 그 다음날 올레길은 잠시 멈추고 다시 그 카페로 들어가 하루종일 책만 읽는데 사장님이 다가오셔서는 "진짜 여행을 제대로 하시네요" 하시며 어제 먹었던 녹차라떼를 한잔 딱. 항상 사람들이 제주에 오면 미션클리어 하듯이 '몇일만에 올레길 몇개 걷기' 또는 일정에 치여 빠르게 빠르게 움직이는데, 혼자 제주까지 와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책한권에 푹빠져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그 낭만이 참 멋있다며 자신이 제주에 온 이야기 그리고 걷게 된 이야기들을 말씀해주시는데 그 순간이 너무 기분이 좋았던 거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루종일 책 한권을 그것도 깊이 빠져 읽은날이기도 또 이런 여행도 참 재미있구나 라는 걸 알게 된 날이기도. 나는 어느새 취업을 하고 가정도 꾸려 지금 아이를 안고 있지만, 그 추억이 너무 엊그제 일같이 생생히 떠올라 후딱 들어가서는 "녹차라떼 한잔 주세요". 세월이 너무 흘러 사장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나혼자 그때 기억 떠올리며 책꽂이를 쭈욱 보는데 '어?? 이 책이 아직도 있네?'. 너무나 재밋게 읽었던 그때 그 책이 거기에 딱 있는거지! 그리고 내 손에는 세상 맛나게 마셨던 그때 그 녹차라떼가 들려있고. 우연히 10년만에 다시만난 추억으로 맘 속 따뜻함 치사량까지 푹 잠겼다가 "나 너무 졸려 언능 집에가자"라고 울어제끼는 딸래미의 울음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 문을 나서며 "나 참 재밋게 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