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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09. 2016

당당한 여자

여자는 34세 싱글.

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창업자다. 

평소 자신감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자는 ‘당당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무일푼에서 2년 만에 12명의 직원을 보유한 회사로 성장시킬 정도로

그녀는 추진력이 강하고 의지가 확고했으며 열정적이었다.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사업화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매월 직원들의 월급일자는 참 빨리도 다가오는 것 같다. 

요즘은 경기도 안 좋고 거래하던 고객처도 언제 거래를 중단할 지 모른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대부분 직장생활로 시간을 보냈던 여자는 

영업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직원들과 먹고 살려면 끊임없이 고객사를 만들어야 하기에 요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닌다. 

대놓고 일을 달라고 하는 건 왠지 세련된 영업방식이 아닌 것 같아, 

일단 이 사람, 저 사람 열심히 만나고 자연스럽게 홍보를하고 다니다 보면 일감이 들어오겠지 하는 마음이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먹어야 하는 자리도 생기고, 

회사 얘기는 꺼내보지도 못하고 그저 푸념이나 들어주다 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영업이란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기왕 하는 거 즐겨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2~3번은 저녁에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자

연스러운 타이밍에 회사 얘기를 꺼내서 이야기가 잘 풀린 날은 뿌듯한 마음에 쓰린 속이 개의치 않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에게 문자가 왔다.      

연락 좀 하고 삽시다

예전에 직장생활을 할 때 고객사로 있던 대기업의 임원 분의 문자였다. 

여자가 예전에 모시고 해외 의전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여자의 성실함과 센스 때문에 칭찬을 크게 받았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임원 분이 특출난 인재라며 점심을 한번 사주시기도 했다. 

1년 전에 대기업을 퇴직하시고 제조업 쪽의 중견기업의 임원으로 이직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다. 

50대 후반의 임원 분은 인자한 성품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아래 직원들이 모두 존경하고 잘 따르던 분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바쁘신 분이 이렇게 먼저 연락을 주시다니.

여자는 고마움과 반가움에 바로 전화를 했다.


      

여자 : 상무님 잘 지내셨어요. 너무 오랜만입니다.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상무 : 너 혼나야겠다. 내가 먼저 연락해야겠니

여자 : 하하 죄송해요. 제가 조그마한 사업하느라 이렇게 정신 없이 살았네요

상무 : 너무 바삐 사는 것 같네. 여백을 갖고 사시게

여자 : 네네 그러게요. 상무님은 건강하시죠?

상무 : 나야 거뜬하지. 언제 소주 한잔 합시다

여자 : 네~시간 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상무 : 26일이나 27일 중 만나세. 그 동안의 무용담도 들려주겠니

여자 : 하하 무용담이랄게 뭐 있나요. 27일 좋습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상무님!



여자는 뿌듯했다.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에게 잘 했었더니 

이렇게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기회가 생기는 것 같았다. 


역시 사업에선 인간관계와 평판 관리가 중요해.

  혹시 알아. 이번 기회에 상무님이 영업라인을 소개라도 시켜주실지지…’


 

약속된 날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대기업의 임원까지 지내셨던 분이니 아무 장소에서나 뵙기 조심스러웠다.

여자는 고급 한우 화로구이집의 룸을 예약했고, 주소와 지도를 문자로 보내드렸다. 

여자는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하게끔 퇴근을 했고 비를 뚫고 약속 장소로 갔다.


이미 상무님은 와계셨다.


여자 : 어머, 상무님 안녕하세요! 먼저 와 계셨네요~

상무 : 이야, 정말 오랜만이네. 잘 지냈는가

여자 : 네네, 연락 먼저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2여년 만에 만난 분인데 여전히 온화하고 인자한 표정과 품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여자는 음식 주문을 했고 반가움을 표현했다.

여자 : 상무님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상무 : 야 내 나이 내일모레 예순이다.

여자 : 아니에요. 정말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마음이 편해지셨나봐요

상무 : 염색을 해서 그렇지 뭐. 너는 어떻게 살았니


 여자는 그간의 안부를 짧게 전했고 

그 이후로 상무님의 무용담이 시작되었다. 

대기업 임원을 그만두고 중견기업에 새롭게 입사해서 자리잡기까지. 

많은 것을 내려놓고 굴욕적인 순간, 자존심을 구긴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인정을 받게 된 히스토리.

디테일한 에피소드까지 전개되느라 약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여자는 소고기 한 점 한 점을 구우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열심히 경청했다. 

고급 소주 <화요>를 주거니 받거니 한잔 씩 마셨다.

상무님이 더 말이 많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끝나나 싶더니 논어, 삼국지 이야기까지 왔다.


자는 피로함을 느꼈지만 다 좋은 말씀이고 연세도 아버지 뻘이니,

최대한 예의 바르게 경청하며 적당한 리액션을 하며 분위기를 맞췄다.


소주 2병 째가 비워질 무렵, 상무님이 질문한다.


      

상무 : 그래서 넌, 결혼은 안할꺼니?

여자 : 그러게요. 인연 만나기가 참 어렵네요 상무님

상무 : 너처럼 똑똑하고 예쁜 애들이 남편감 고르기가 더 어렵지.

          남자는 결혼은 만만한 여자랑 하거든

여자 : 네? 만만한 여자요?

상무 : 그래,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회생활 하기에 마음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여자랑

결혼하는 법이야. 그래서 자기가 콘트롤 할 수 있을 만한 여자를 고르지.

여자 : 네, 근데 요즘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다 그런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상무 : 시대는 변해도 남자는 안 변해. 너도 좀더 만만하게 보이는 지혜를 발휘해봐


여자는 이건 왠 개뼉다구 같은 소리인지 했는데 티는 낼 수 없었다.

어색한 미소로 대화를 진척시키지 않는 게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상무 : 그럼 너 결혼할 남자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애인해줘야겠다

여자 : 하하~저 애인 없어도 잘 지내요 상무님

 

여자는 생각했다. '약주가 좀 취하셨구나...농담이 지나치시네. 자리를 슬슬 정리해야겠다...'


      

상무 : 진짜야. 다다음주에는 남산에 좋은 데 있으니까 거기서 만나자


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이 재미있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멘트는… 농담인 것 같지는 않은데.

약간의 불쾌함까지 느껴졌다. 여자는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 상무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이제 들어가시죠

상무 : 야~ 2차 해야지. 오랜만에 보는 건데 서운하게

여자 : 제가 사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좋아서요. 담에 또 뵈요

상무 : 그래 그럼 그러자

여자 :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대리 부르시면 될 것 같아요 상무님


밖은 아직 비가 오고 있었다.

여자는 불쾌해진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며, 끝까지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말했다.


      

여자 : 상무님 오늘 너무 잘 먹었고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상무 : 너 혼자 사니? 집이 여기 근처였지?

여자 : 네…자취한지 꽤 됐죠.

상무 : 내가 집에서 커피 한잔 얻어먹고 싶다 그러면 오해 할라나…?

순간 여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자 : 네???

상무 : 허허 농담이네 농담. 놀라기는

여자 : 저 죄송한데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대리 올때까지 못기다려드리겠네요

상무 : 그래그래 먼저 들어가. 가기 전에 허그 한번 하세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와락 허그를 시도하는 순간에

여자는 반사적으로 엉덩이와 가슴을 최대한 뒤로 빼고 팔만 살짝 걸쳤다. 

여자의 눈앞에는 인자하고 온화하던 얼굴 대신 역겹게 느껴지는 눈빛만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

그제서야 욕이 나온다.      

아 씨X. 진짜 빡 도네. 미친 거 아냐. 영감탱이

어디서 수작이야 진짜. 아 열 받아!!!


흥분을 가라앉혔더니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밀려왔다.

사실 존경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보다 그 감정이 더 컸다.

왜 거기서 더 단호하게 정색하지 못했는지. 왜 자신의 불쾌함을 표현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고 속이 상했다. 

그 무엇을 위해 그런 희롱 앞에서 나는 타협을 했던 건지. 

나의 마음 속에 관계 유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통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그저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에 불과한 것인가. 

여자는 머리가 복잡했다. 

스스로 능력 있고 독립적이고 당당하고 스마트한 여성이라고 자부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사실 내가 보기에도 당시 여자의 대응은 딱히 올바른 매뉴얼은 아니었다고 본다.


      

"상무님, 방금 언급하신 말씀, 제가 오해하기 충분한 여지가 있어

농담이 좀 지나치셨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상무님 계속 뵙고 싶은데

이런 농담을 하시면 제가 지금처럼 불편해질 것 같습니다."

정도의 멘트를 단호하고 야무진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 정도가 적당한 대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시나리오가 없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상적인 멘트들은 다 까먹은 채

상황을 회피하거나 웃음으로 무마하거나 하는 식의 병신 짓을 할 때가 많다.

나도 그랬다. 아직도 종종 그러고 말이다.


이러한 종류의 성희롱이나 개수작을 겪을 때 완벽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해야 할 옳은 말과 행동들이 늦게 떠오를 때도 있다. 

그런 사람도 있다. 


우리 모두가 완벽하게 똑똑하고 진취적일 수는 없기에, 

우리 모두가 언변이 수려하고 감정표현을 바로 하는 사람일 수는 없기에.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 시대의 당당한 여자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 


 

여자는 이틀 뒤 온전히 이성적인 상태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상무님, 엊그제 몇 가지 농담하신 것

당시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제가 불쾌하고 불편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 농담이 어떤 것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상무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여자는 답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노인네 응큼한 마음에 대한 사과를 받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정도 일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앞으로도 겪을 수도 있다. 

쪽팔릴 만한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예순까지 온 버릇을 고칠리는 만무하며,

세상이 갑자기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 

단지, 여자는 그때 당시 그 정도밖에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바로 잡고,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 여자는 깨닫게 되었다.

원치 않은 상황을 겪었을 때 자신의 있는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타이밍을 못 맞췄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에 대해 반드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 또한 큰 용기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한걸음의 발전을 했음에 마음이 편해졌다.


 

당당하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논리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화법과 대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 온 자신의 삶이 부끄러움이 없고 떳떳하여  생기는 스스로에 대한 신념과 

정직한 열정, 옳은 것(right thing)을 말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들이라 본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당당함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들이 겪어야 할 모호한 희롱의 순간들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당당한 하루를 얼마든지 살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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