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섭섭 Sep 19. 2015

생도 여기에 나도 여기에

터키 샤프란볼루

유럽 대륙에서의 넉 달 남짓한 방랑은 꿈처럼 황홀하였다.


‘죽기 전에 이것은 봐야 하지 않나?’하는 광경 중 둘째 가라면 서럽다는 북쪽 하늘의 오로라를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많이 봤고,

북쪽의 빛, Nothern Lights(Aurora Borails). 아이슬란드.

‘가장 로맨틱한 도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장 정열적인 도시’ 등등 가장 그럴싸하게 이름 붙은 장소들에서 매일 밤 몸을 눕히곤 했다.


다이어리 마지막 장에 오랫동안 적혀있던 <보고 싶다> 세계 명화들의 목록이 대부분 지워졌고, 꿈에서나 종종 만나던 예술가들과 대면을 하기도 했다. 100살이 갓 넘는 형도 있었고 600살 중반을 훌쩍 넘기신 형도 있었지만, 예술은 영원하기 때문에 모두들 여전히 건강하였다.


이슬람 사원에서 울리는 곡소리에 잠을 설쳤는데, 다음날 길을 나서 보니 한집 건너 한집이 교회인 도시에 와있는 신기한 일도 있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AD.80년생
 천년의 도시, 마라케시의 골목길. 모로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파스타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 중 무엇을 먼저 먹을까 하는 것이 고민거리였고, 무엇을 선택하든 값 싸고 질 좋은 색색의 포도주는 비현실적인 밤들을 더욱 몽환적으로 색칠해주었다.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이나 'Mr. Tambourine Man" 따위를 매일 밤 들으며 빈센트, 알렌산드라, 파비오, 저스틴 등의 온갖 이국적인 돌들과 함께 굴렀던 유럽 방랑이었다.

프랑서 서부의 소도시 Pontchâteau, 빈센트의 고향 집.
!?

그런데 어쩐 일이었을까? 그 반짝반짝 빛나던 유럽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터키의 이스탄불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심한 두통을 앓았다. 여행자의 천국 이스탄불도, 형형색색의 풍선이 둥둥 떠다녀 아름답다는 카파도키아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이스탄불 공항에 내리자마자 야간 버스를 찾아 나서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여섯 시간이 떨어진 마을 샤프란볼루를 찾았다.

 

‘샤프란볼루’,

이름이 무척이나 아름답기에.

도대체 얼마나 잔 걸까.

배가 고프면 일어나서 밥을 먹고, 쉬가 마려우면 일어나서 쉬를 하기도 했는데,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정신을 차리니 날짜 관념이 전혀 없다. 반눈을 뜨고 달력을 확인해보니 터키에 온 지 4일째가 되는 날이다. 3일을 내리 잔 모양이다.


몸이 가볍다.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마을을 걷는다. 골목골목이 마치 개미집처럼 정가롭게 이어져있어, 걸으면 걸을수록 기분이 좋다.

누가 들어도, 듣지 않아도 상관이 없기에, “아이쿠, 생이 여기 있었구나.”하고 중얼거리며 골목골목을 걷는데, 구름 위를 걷는 것이 이렇게 폭신폭신할까?


이건 남겨야겠다, 싶어, 작동이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한 지 오래된 박살 직전의 디지털카메라를 오래간만에 충전하고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보니,

     

여기에 있다.

생도 여기에 있고 나도 여기에 있다.

 

마을 회관 기준 2시 방향의 골목 끝 가장 위대한 대장장이가 여기에 살아서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며 내게 짜이를 끓여주고, 4시 방향 골목의 메시와 호날두가 나에게 공을 뻥 차 준다. 집 앞 식당 카짐 아저씨가 길 가는 나를 급히 불러 세우더니 터키쉬 커피를 한잔 건네준다. 물을 한 병 사려고 들어간 숙소 앞 슈퍼마켓의 청년은 기도하러 갈 시간이라며 내게 잠깐 가게를 봐달라고 하고, 슈퍼 맞은 편 떡집의 분홍색 아기가 걸음마를 시도한다-아이는 마침내 지구 위에 자력으로 첫 걸음을 올렸다.

동네 뒷동산에 올라 홀로 내려보는 마을 전경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피렌체.

북쪽 하늘의 오로라도 위대하고 불멸의 로마 제국도 위대하고 피카소도 가우디도, 반 고흐도 위대하지만, 터키의 오래된 마을 샤프란볼루에는 아주 오래된 농담들이 살아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 그것들에 존재하는 위대함을 본다.

존재 자체가 이미 세상 가장 무엇, 무엇한 무엇인 무언가.    

                                               


                           

#이런 힐링... 처음이야.

#샤프란볼루로 오셔요

#오로라도 위대하고 로마 제국도 위대하고 피카소도 위대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물들에서 위대함 발견하는 하루 보내시길.

#머지않아 세상 가장 뭐뭐한 무언가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니!

매거진의 이전글 암비햐 세우세스뗏 하푸탈레 스리랑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