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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섭 Sep 23. 2015

‘왕 어부’라 적혀있는 맥주병을 바라보며

남인도 케랄라주, 이름마저 인도양스러운 ‘바르깔라’ 해변에 축- 늘어졌다. 이렇게 평화로운 해변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여기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신혼여행지는 이곳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동네에서 가장 좋은 방 빌려놓고 향기로운 커리 떠먹고 맥주 마시면서 한 세월 늘어지면 세상 시름 모조리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얕고 투명한 바다, 조용하면서 활기찬 어촌 사람들, 단 두 군데뿐이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한 음식을 내놓는 식당,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석양. 뭐가 더 필요할까.     

워낙에 작은 마을이라 해변에서 파도를 맞으면서도 호텔에서 새어 나오는 와이파이를 잡아 인터넷을 할 수 있다. 파도 서핑을 하다 지치면 모래사장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웹서핑을 하곤 하는데,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이메일도 확인하고 더는 할 것이 없어 인터넷 뉴스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사회면을 내리며 읽다가 왠지 기분 더러운 공포 영화를 보는듯한 찝찝함이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면으로 넘어갔다.     

명망 높은 프로농구 감독이 승부 조작 혐의로 구속되었고, 야구 국가 대표팀은 국제대회 본선 1차전에서 2승 1패로 탈락했다고 하는 뉴스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라와 있다. 국내 농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한 명이자 가장 훌륭한 감독 중 한 명인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식 밖의 범죄를 저지르고, 3경기 중 2경기를 이긴 야구 대표 팀에 관한 기사에 <충격>, <대참사> 등의 머리말이 붙었다. 

아뿔싸, 3경기 중 2경기를 이긴 대표 팀의 감독은 석고대죄를 하며 조국으로 돌아왔다.     


잠시 잊고 지낸 나의 나라가 저기 바다 건너에 있었다. 

내가 돌아가 인간 구실을 할 것을 강요받을 나의 나라가 거기에 있다. 불법을 저지를 것과 규칙을 어길 유혹을 받을 때도 있겠으나 어떤 상황에서도 백전백승을 해야 인간답게 산다는 소리를 들을 나의 조국.     


철썩철썩-

영어단어 시험을 보고 나서, 한 문제에 한대씩 틀린 개수만큼 허벅지에 몽둥이를 맞던 고등학교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철썩철썩-

아라비아해의 파도가 처얼썩처얼썩-


왕 어부(King Fisher)라 적혀있는 맥주병을 바라보며 세상을 잊는다, 바르깔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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