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섭 Mar 27. 2016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페루의 북쪽 끝 마을, 와라즈(Huaraz)

꽃처럼 향기로운 이들을 몇 만나 나에게도 마치 향기가 나는 양, 꽃 행세를 하며 지내다가 모처럼 홀로 남겨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늙은 서랍 속의 낡은 카메라 폰을 달랑달랑 들고 지붕과 담벼락과 전봇대의 꽃들을 담아 넣었다.

가꾸어진 화단의 꽃들보다 지붕과 담벼락과 전봇대의 꽃들이 나는 애착이 간다. 그들이 더 강해 보이기 때문도, 그들이 왠지 애처로워 보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만 같아서, 아름답다. ‘자연스러움’은 내게, ‘아름다움’의 동의어다.   

  

여행지를 떠날 때마다 수건이나 속옷을 한 장씩 숙소에 남기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꼼꼼히 다 챙긴다고 챙기는데도, 떠나고 보면 무언가 하나씩은 꼭 빠져있는 것이다. 떠나는 자들은 왜 항상 무언가를 남기는 걸까.


국제 공용어인 영어가 ‘떠나다’라는 뜻의 동사와 ‘남기다’라는 뜻의 동사를 ‘leave’로 공유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떠나는 자들이 무언가를 남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같은 단어를 쓰게 된 걸까.     


나의 떠남은 수건이나 속옷 따위를 남길뿐이지만, 지나간 만남은 여운을 남긴다. 아쉬웠던 만남은 아쉬움을 남기고 못마땅했던 만남은 못마땅함을 남긴다. 그리고 너무나 완벽한 만남은 진한 향기를 남긴다.      


페루의 북쪽 끝 마을, 말없이 해발 3800m의 산길을 거닐며, 실없는 생각 잊고자 마추픽추에 다녀온다. 꿈 속보다 더 꿈속 같던 리마 해변도 걸어본다. 그 장소에 그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 간혹 진지한 이야기가 있고, 수많은 농담들 그 웃음들 꽃이 되어 있다. 향기가 참으로 좋아.

     

꽃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태수 녀석을 서울에서 다시 만나거든 그 이름들을 물어봐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사진기에 이어폰을 한 쌍을 꽂았을 때, 故김광석은 노래하고 있었다.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7월의 끝자락, Huaraz의 꽃 피는 겨울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