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머스, 바다, 그리고 사막: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11
기노사르 마을 상점에서 빵과 우유를 샀다. 이 가게에서 어제 점심과 저녁, 술, 오늘 아침까지 해결했군. 9시 반쯤 길을 나섰다. 도로를 따라 걷다 아르벨 절벽(Arbel Cliff) 방향으로 빠졌다. 지도를 봤다. 절벽을 빙 돌아서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 코스다.
“설마 이 절벽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절벽을 넘어가면 바로 다음 마을로 갈 수 있겠다고 농담을 했는데, 걷다 보니 실제 절벽을 걸어 오르고 있다. 다시 지도를 확인해봤다. 우리가 가는 코스에 고등선이 촘촘히 그려져 있다. 절벽 끝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코스다. 왜 고등선을 못 봤을까. 산을 에둘러 가는 평지 길인 줄 알았는데. 하늘을 찌르는 절벽의 정상까지 오르게 될 줄이야….
“야, 너무 힘들어. 일단 밥을 먹자.”
아무 바위에나 털썩 주저앉아 내가 말했다. 산 아래로 기노사르 마을이 보인다. 기노사르 마을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는 대형 쇼핑단지도 보인다. 도보로 왕복 한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들르지 않은 저곳…. 지금 저곳에 있다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을까.
“맛있는 햄버거를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장도 왕창 봤겠지.”
D가 말한다. 몸을 던져 저곳으로 날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우리는 새가 아닌 인간이고, 그에 더해 걸어 다니는 트레커니까. 걸어서 이 절벽을 넘는 수밖에. 시원한 몰에서 육즙 터지는 햄버거를 먹는 대신, 절벽 바위에 걸터앉아 아침에 만들어 짊어지고 온 쿠스쿠스를 먹고 일어났다. 반대 방향에서 걸어 내려오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D와 나만 헉헉거리며 가파른 절벽을 오르고 있다. 중턱 즈음에 도착하니 동굴 요새 유적이 보인다. 유적을 지나니 가파른 절벽길이 이어진다. 바위에 박힌 철 사다리를 붙잡고 암벽을 올랐다. 가파른 경사에 다리가 후들후들하다. 그렇게 걷고 걸어 닿은, 절벽의 저편.
“와….”
탄성이 절로. 햇살 아래 반짝이는 거대한 갈릴레호가 한눈에 보인다. 걸었을 뿐인데.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름다워. 아! 아름다워!”
푸른 호수. 부드러운 바람. 호수 위에 새겨지는 바람자국. 미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따로 할 수 있는 건 없고, 아름답다는 탄성만 무한 반복한다. 절벽을 오를 땐 힘들었는데. 다 오르고 나서 이런 풍경이 나오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다가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쇼핑몰에 들어가 빙수를 먹고 있는 것보다 더 통쾌하고 상쾌해. 아름답다. 아름다운 길이다. 정말 아름다운 길이야….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걸어 산 너머로 내려왔다. 세 시간을 더 걸어 미츠페(Mitspe)에 닿았다. 여기서 오늘의 걸음을 마무리하면 딱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미츠페에 사는 트레일 엔젤은 없다. 대신 마실 물은 있다. 친절하게 ‘식수’라고 쓰인 안내가 붙은 수돗가에서 물을 충전했다. 마을을 나오니 24시간 마트가 보인다. 오늘은 샤밧이라 다 문을 닫았으려니 했는데, 아랍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문을 열었다. 다행이다. 햄과 빵을 샀다. 햄과 빵이 지겹긴 하지만…. 굶으며 걷는 것보단 나으니 감사히 먹어야지. 밥을 먹고 도로를 한참 지나 큰 도시인 티베리아스(Tiberias)에 닿았다. 티베리아스에는 여러 명의 트레일 엔젤이 산다. 한데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걸은 대가로 오늘의 운이 다 했는지, 하룻밤을 묵어도 되겠느냐는 부탁을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티베리아스를 지나니 스위스 숲길(Switzerland Forest)이라는 곳이 나온다. 자전거 길이 깔린 걷기 좋은 숲길이다. 갈릴레호는 아직 우리 곁에 있다. 해가 저물어 가는 호수에는 절벽 위에서 봤던 호수의 색과는 다른, 붉은색이 끼어들고 있다. 호수 위로 황갈색의 산맥들이 비춘다. 붉은 하늘과 황갈색의 산맥이 녹아든 파란 호수. 모두 하나가 된 듯 풀어져 있는, 파스텔 톤의 색깔 층. 아름답다. 아름다워….
“우리 근데 어디서 자? 해 다 져 가는데.”
한창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D가 산통을 깬다. 그래. 아름다운 건 둘째 문제고, 생존을 챙겨야지. 오후 5시가 되어간다. 다음 마을인 포리야(Poriya)까지 가고 싶지만, 어둑한 밤길에 숲길을 걸어 거기까지 갈 순 없다. 불안한 마음으로 숲길을 따라 걸으며 텐트를 칠 만한 장소를 찾았다. 한참을 헤매다 나무 사이에 적당한 공간을 골라잡았다.
“아까 24시간 가게에서 햄은 괜히 산 거 같아. 너무 많아.”
내가 말했다.
“그래도 다 먹어 치워야 해. 동물들이 냄새 맡으면 텐트고 뭐고 다 찢어버릴지도 몰라. 햄을 먹어 치우고. 우리 손까지 먹어 치우겠지.”
햄 8장을 포개 넣은 샌드위치를 입에 먹었다. 텐트에 오그리고 앉아 햄 8장을 우적우적 씹고 있으려니 짐승이 된 기분이지만…. 진짜 짐승이 나타나길 원하는 게 아니라면, 다 먹어 치워야 해.
배부르다.
자자.
새벽같이 일어나 텐트를 정리하고, 마을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