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콘텐츠: 애틋함에 대한 이야기
서로에게 가 닿으려 하는 마음과 마음 사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는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이야기>의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애틋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의 기원이 된 이야기이다.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
고대도시 바빌론에는 퓌라무스와 티스베가 살고 있었다. 퓌라무스는 젊은이 가운데 가장 잘생긴 청년이었고, 티스베는 모든 처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퓌라무스와 티스베는 사랑에 빠졌는데, 그들은 서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 사랑이 깊어감에 따라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둘의 아버지가 모두 결혼을 반대하는 탓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집 사이에 놓인 담장에는 조그마한 균열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종종 그 구멍에 대고 사랑의 언어를 속삭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없었지만 담벼락 이쪽저쪽에 자리 잡고 서서 상대방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퓌라무스와 티스베는 감시자를 피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 도시를 떠나되, 들판을 헤매다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곳, 약속 장소로는 니누스왕의 무덤가가 제격이었다. 그들은 그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티스베는 솜씨 좋게 문을 열고,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니누스왕의 무덤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어둠이 깔린 밤이었지만, 사랑은 티스베의 마음을 대담하게 만들어주었다. 무덤가에 다다른 무렵, 숲 속에서 암사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방금 사냥을 끝내 주둥이를 피로 물들인 채 암사자는 갈증을 식히기 위해 샘을 찾고 있었다. 사자를 발견한 티스베는 깜짝 놀라 겁에 질린 걸음걸이로 어두운 동굴 안으로 도망쳤다. 티스베는 너무 놀란 까닭에 메고 있던 목도리가 땅에 떨어진 줄도 몰랐다. 다행히도 티스베는 동굴 안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티스베가 동굴 안에서 숨어있는 동안 암사자는 샘을 찾아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돌아가는 길에 티스베가 떨어트린 목도리를 발견했다. 암사자는 피가 흥건한 입으로 목도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는 유유히 길을 떠났다.
이내 퓌라무스가 도착했다. 그는 들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윽고 피로 물든 채 찢어진 목도리를 발견한 퓌라무스는 절망했다. 사자가 티스베를 해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늦게 도착한 자신을 원망했다.
"하룻밤이 두 연인을 죽이는구나. 그녀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했는데. 모든 것이 내 잘못이야. 가련한 소녀여, 내가 그대를 죽였소. 내가 그대더러 밤에 이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오라고 해놓고는 먼저 와 기다리지 않았으니 말이오. 너희는 내 몸을 갈기갈기 찢고, 너희의 사나운 이빨로 내 죄 많은 내장을 삼키려무나. 이 절벽 아래의 굴에서 사는 모든 사자여! 하지만 죽기만을 바라는 것은 겁쟁이가 하는 짓이다."
퓌라무스는 망설이지 않고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신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래된 수도관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퓌라무스의 옆구리에서는 붉은 선혈이 쉴 새 없이 솟구쳤다. 퓌라무스의 붉은 선혈은 뿜어져 나무에 열려있던 오디를 붉게 적셨다.
한편 티스베는 동굴 속에서 피신한 채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두려움은 잦아들었다. 티스베는 자신이 사자로부터 도망친 이야기를 퓌라무스에게 하리라 마음을 먹고 동굴 바깥으로 나왔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자 누군가 피투성이가 된 채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티스베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잠시 뒤 피투성이의 누군가가 퓌라무스임을 알고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퓌라무스를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퓌라무스, 대체 어떤 불운이 나에게서 그대를 빼앗아간 거예요? 퓌라무스, 대답 좀 해요! 그대의 가장 소중한 티스베가 그대를 부르고 있잖아요. 내 말을 듣고, 축 늘어진 고개를 들어보세요!"
퓌라무스는 마지막 힘으로 티스베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티스베는 결심했다.
"불행한 이여, 그대의 손과 사랑이 그대를 죽였군요! 내게도 이런 일을 해낼 만큼 용감한 손이 있어요. 내게도 사랑이 있으니, 그것이 내게 이런 부상을 입힐 만한 힘을 줄 거예요. 나는 그대를 따라 죽겠어요. 그러면 내가 그대의 죽음의 가장 애처로운 원인이자 동반자라고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죽음만이 그대를 내게서 떼어놓을 수 있었지만 이젠 죽음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 오오, 참으로 가련한, 나와 그이의 부모님들이시여, 부디 우리 두 사람의 청을 들어주어, 확실한 사랑과 죽음의 시간에 의해 하나로 결합된 우리가 한 무덤에 함께 눕는 것을 시샘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아직은 너의 가지로 한 사람의 가련한 몸을 가려주고 있으나, 곧 두 사람의 몸을 가려주게 될 나무여, 너는 우리 죽음의 휘장을 간직하되 우리 두 사람이 흘린 피의 기념물이 되도록 언제나 애도에 적합한 검은 열매를 맺도록 하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티스베는 칼을 가슴에 꽂았다. 그녀의 시신은 그의 주검 위로 엎어졌다. 신들과 부모님은 그들의 사랑에 감동하였다. 그때부터 오디는 익은 뒤에 검은색으로 변했고, 퓌라무스와 티스베는 하나의 유골 항아리에 담기게 되었다.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애틋함에 대하여
퓌라무스와 티스베 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놓여있다.
우선 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낮에는 담장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담장의 조그마한 구멍은 퓌라무스와 티스베의 소통 창구가 되어주었지만, 그들이 만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공간을 갈라놓고 있었다. 이것은 첫 번째 상징이다.
다음으로 퓌라무스와 티스베 사이에는 시간이 놓여있다. 약속 장소에 조금 먼저 도착하고, 조금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절망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시간이란 질량을 가진 장애물이 아니지만 사랑의 성사를 방해한다는 점에서는 담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은 두 번째 상징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티스베가 이미 죽었다고 오해한 퓌라무스는 너무도 쉽게 죽음을 선택하고, 이를 목격한 티스베 또한 뒤이어 죽음을 선택한다. 그들은 죽음마저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 선택은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종말을 가져다주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상징이다.
담장, 시간, 죽음.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를 벗어나면 세 단어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세 단어는 하나의 의미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에게 닿지 못하도록, 공간을 가르고 시간을 가르고 모든 가능성마저도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에 관한 상징이라고 본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은 본능이다. 특히 나이가 어리고 순수할수록 이 마음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곁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인가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꼭 육체적인 합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사랑은 때때로 육체적인 사랑보다 강렬한 열정을 보여준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도 있지 않나. 육체적인 접촉을 넘어 서로의 마음과 영혼에 닿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없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대개 사랑 사이의 거리를 느끼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마음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이기에, 진정으로 상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다.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직접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내 상황에 대입해서 유추할 뿐, 즉각적으로 그 마음을 체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담장'과 '시간'과 '죽음'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를 늘려놓고는 한다.
서로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과 마음,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그 사이의 거리. 여기에서 드러나는 애틋함은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야기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2000년 전 신화를 보았으니, 이제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살펴보자.
기억의 거리, <이터널 선샤인>
과묵하고 소심한 남자 조엘과 즉흥적이고 적극적인 여자 클레멘타인은 몬토크의 어느 해변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정으로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열정은 사그라들었고, 둘은 성격 차이로 자주 다투었다. 조엘은 즉흥적으로 사는 클레멘타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반대로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생활이 따분해 보였다. 발렌타인데이가 가까운 어느 날, 다툼에 지친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워주는 라큐나 주식회사에 찾아간다.
라큐나 주식회사에서는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고객이 원하지 않는 기억을 지워준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의뢰하면 그것을 녹음하고는, 지정된 날짜에 고객의 집을 방문해서 고객이 잠든 사이에 두뇌를 스캔한다. 그리고 밤새 의뢰받은 기억을 모조리 삭제한다. 고객은 자신의 기억이 지워진 것도 알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하게 되고, 기억을 지워버린 채 살아간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삭제했다. 유명한 서점에서 근무하는 클레멘타인은 여느 날처럼 서점에 출근했고, 자신보다 어린 남자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조엘은 사과의 의미로 클레멘타인에게 발렌타인데이 선물을 주기로 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근무하는 서점에 찾아가 선물을 건넨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알아보지 못한다.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누구세요?"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어린 남자가 클레멘타인의 옆에 다가와 클레멘타인에게 키스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사무적인 태도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라고 말하고는 어린 남자와 사랑을 속삭인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조엘은 좌절한다.
집으로 돌아온 조엘은 친구를 통해 클레멘타인이 자신에 관한 기억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깊은 좌절에 빠진 그는 자신도 그녀처럼 기억을 삭제하기로 한다. 조엘은 라큐나 주식회사에 찾아가 발렌타인데이 전날 밤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기로 한다.
기억을 지우는 밤, 조엘의 꿈속에서는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펼쳐진다. 가까운 기억부터 차례로 펼쳐진 기억은 하나씩 점차로 사라져 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엘의 마음에 한줄기 빛이 비친다. 조엘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기억을 삭제하고자 한 행동을 후회한다. 기억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이 기억만은 제발 남겨달라며 절규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기억은 계속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에서 그들은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클레멘타인: 잘 가 조엘.
조엘: 사랑해.
클레멘타인: 어쩌면, 몬토크에서 만나.
발렌타인데이 아침, 잠에서 깬 조엘은 평온하게 아침을 맞이한다. 클레멘타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출근길에 나선 조엘은 전철을 기다리다가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반대방향의 열차에 탑승한다. 열차는 몬토크로 향했다. 몬토크의 해변에 도착한 조엘은 역시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몬토크에 온 클레멘타인을 마주한다. 기억이 모두 삭제된 까닭에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다.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이 그들의 마음을 비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사랑에 빠진다. 빙판 위에서의 두 번째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함께 조엘의 집으로 가기로 하고는 잠시 짐을 가지러 클레멘타인의 집에 들른다. 간단한 짐과 우편물을 챙겨 차에 탑승한 클레멘타인은 라큐나 주식회사에서 온 우편물을 확인한다. 우편물에는 편지와 카세트테이프가 동봉되어 있었는데, 편지에는 자신이 라큐나 주식회사의 직원이며 기억을 삭제하는 일에 환멸을 느껴 고객에게 삭제한 기억을 되돌려주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상한 장난이라 생각한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자동차에 내장된 오디오박스를 통해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한다.
카세트테이프에는 클레멘타인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차에서 쫓아낸다. 하지만 조엘의 집에도 우편물이 도착해 있었고, 조엘은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잃어버렸던 기억을 확인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집으로 찾아간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맞이하고, 함께 자신이 라큐나 주식회사에서 녹음했던 음성을 듣는다. 조엘은 사과한다. 클레멘타인은 괜찮다고 말한다.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조엘의 음성은 자꾸만 클레멘타인을 비난한다. 조엘은 또다시 사과한다. 혼란스러워진 클레멘타인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는 문을 나선다. 조엘은 그녀를 쫓아 아파트 복도로 뛰쳐나온다.
조엘: 기다려요!
클레멘타인: 왜요?
조엘: 모르겠어요.
클레멘타인: 왜 그래요 조엘?
조엘: 좌우지간 기다려요! 몰라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제발...
클레멘타인: 좋아요!
조엘: 정말요?
클레멘타인: 난 개념 없는 여자예요.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천방지축이죠. 난 완벽하지 않아요.
조엘: 내겐 당신의 결점이 안 보여요.
클레멘타인: 언젠간 보이겠죠.
조엘: 지금은 그래요.
클레멘타인: 당신도 언젠가 알게 되고 나도 당신이 지겨워지고.. 결국 이를 갈겠죠.
조엘: 뭐 어때요. 좋아요.
클레멘타인: 좋아요?
조엘: 좋아요.
클레멘타인: 좋아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다. 티 없는 마음과 마음 사이를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이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