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바다에 던진 소년
글과 사진이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의 이야기.
미술관에는 그림도 있고 사진도 있다. 사진은 그림에 비하여 순간으로 대상을 표현한다. 다만 그 찰나를 포착하려면 기다려야 한다. 빛이 순간을 장악하고 사물의 영혼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순간, 셔트를 누른다. 해서, 사진은 빛에 기댄 예술이다. 반면에 빛은 또 사진덕분에 살아남는다. 저물어가고 사라질 빛을 사각의 틀 안으로 부여잡아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진이기 때문이다.
미술관 옆 도서관 네번째 이야기는 사진이 붙들어 맨 빛을 더듬어 사라져 버린 ‘기억’을 불러내고 그 덕분에 부활하는 ‘기록’을 읽고자 한다. 또한 수많은 빛들이 모여 장구한 역사가 되는 현장을 사진과 책이 각각의 장르에서 같은 주제로 변주한 장면들을 넘겨본다.
강운구의 사진과 함께 읽는 마지막 책은 데이비드 위즈너의 글 없는 그림책 [그림상자]다.
바닷가에서 놀던 소년은 미역과 같이 떠 내려온 카메라를 발견한다. (*참고 원서 제목은 Flotsam으로 부유물이란 뜻이다. 인화를 했더니 사진 속에는 신기한 세상이 그득하다. 태엽 감은 물고기가 등장하고 문어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사진을 찍혔다. 거북의 등위에 소라 마을이 자리 잡았고 외계인 같은 존재가 바닷속에서 잘 살고 있다.
불가사리가 떠 받치고 있는 섬도 있다. 돋보기로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더니 다른 사람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들고 자신의 사진을 찍은 장면이 있다. 옛사람들의 사진 위로 점점 오늘날의 얼굴이 보인다. 소년도 사진을 들고 자신을 촬영한다. 카메라를 다시 바다로 던진다. 상상의 세상으로 맘껏 여행하고 현실로 돌아온 소년, 카메라를 바다를 향해 멀리 던진다.
파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 소년의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가 될 것이다. 장면이 바뀌고 어느 먼 나라의 해변, 이번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카메라를 발견한다.
[시간 상자]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소년의 눈이다. 관찰하기 좋아하는 눈이기에 카메라를 발견한다. 아주 작은 세계도, 세상 그 너머도 볼 수 있다. 상상 속의 바다가 사진 속에 그득한 까닭이다. 두 번째는 시간이다. 카메라 속에 담긴 세상은 먼 옛날 세상이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세상, 그리고 오늘이 있기 까지 옛사람들의 모습. 오늘날의 시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 번째는 관계다. 소년은 자신 앞에 던져진 카메라를 응시한 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금방 깨닫는다. 그 전에 카메라를 본 사람들처럼 자신 또한 사진을 찍은 후 카메라를 다른 사람에게 던진다. 사라져가는 기억의 전승이요, 이것이 바로 기록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상상과 기억을 모두 기록한다. 이를 기반으로 또 다른 인간이 꿈을 꾸며 어떤 인간은 그 꿈을 종내에 실현시킨다.
카메라는 눈이다. 눈은 순간을 포착하고 사진은 영원한 현재를 꿈꾼다. 이상향을 향한 인간의 염원이 담긴 꿈이다. 강운구의 사진으로 돌아가 본다.
‘이 사진은 전북 장수의 짚이 아닌 억새로 지은 건새집을 찍으러 갔다가 때아닌 함박눈이 내린 덕분에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 날 그때 설핏하게 기울던 해가 낮게 깔린 구름 속으로 잠겼을 때, 느닷없이 장난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궁핍하던 시대에 궁핍하던 사람들이 짓던 이 넉넉한 표정과 분위기는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강운구 ‘마을 삼부작’중에서
인간의 역사는 살아온 날들이 소멸하는 것에 끊임없이 저항해왔다. 때로는 그림과 사진으로 장면만을 살리거나 때로는 긴 이야기로 여러 장면을 재구성했다. 이는 모두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요, 그간의 경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시도다. 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장면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후대는 그 너머의 시간과 공간을 본다. 사진은 빛에 기대어 살아남아 기록을 남기고 기록은 다시 읽는 이의 상상력에 힘입어 시간적 찰나, 공간적 단편, 사건의 표면을 뛰어넘어 저 너머의 본질적인 세상으로 우리의 시야를 확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