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곳에다 고위공직자들의 역량진단 점수를 그래프로 만들어 올렸다. 이게 어떻게 계산되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다 쓴 글 몇 개 읽었다고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조직, 그리고 세계에 관한 인식의 지평이 어느 정도 열리면 그제야 아 이게 그런 거였구나, 하고 느껴질 때가 올 것이다. 학습하는 시간이 꽤 필요하다. 지치지 않고 계속하면 된다.
▶ 인간은 계량화된 점수로 환원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인간에 관한 질문 중에서도 오래된 것이고, 아직도 결론 나지 않았다. 영원히 결론 나지 않을 것이다. 경영학은 이 질문을 소홀이 다루고 있다. 특히 미국식 경영학은 더욱 그렇다. 인간을 온전히 필요에 따라 계량화하여 통제하고 착취하기를 좋아한다.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점수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자 다른 특성과 장단점을 가지고 태어나서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실존적 존재(existential being)다. 인간을 점수로 표현하는 순간, 인간은 그 숫자로 붕괴되고 만다.
내가 지금 쓰는 이 키보드는 5만 원짜리다. 5만 원의 가치를 갖는다. 어디서든 살 수 있다. 아이폰도 마찬가지다. 얼마짜리라는 가격으로 표시되는 순간, 아이폰은 그런 숫자로 환원되고 만다. 스마트폰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가격만 지불하면 내가 원하는 스마트폰은 구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다 그렇다. 인간은 사물의 쓸모와 가격을 비교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판단에 따라 사물은 쓸모없으면 쓰레기가 된다.
어느 날 아들이 집에 왔다. 엄마와 함께 옷가지를 사러 용산역 아이파크몰에 간 모양이었다. 아들은 자기 옷을 엄마가 사줬으니 아빠의 옷을 선물로 사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도 아들이 사준 옷을 가끔 입는다. 그 옷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10년 넘은 냉장고가 고장 나는 바람에 딸이 비싼 최신형 냉장고로 바꿔줬다. 아이들이 선물로 준 옷과 냉장고는 단순히 가격이라는 숫자로 붕괴되지 않는다. 자식들이 준 선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러한 의미부여를 인간 자신으로 확장해보자.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짓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짓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이런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진실한 것인가? 나의 이런 행위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가 사회 전체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을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바뀌지 않는 의미 있는 순간인 것만은 확실하다. 누구에게도 해코지하지 않고, 평온함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곧 나다.
이런 상태를 과연 점수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런 인간을 몇 점 짜리라고 계량화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나와 달리 아내는 아마도 영화, 드라마, 공연 등을 감상하면서 삶의 깊은 의미를 생각할 것이다.
자식들이 선물로 사준 옷과 냉장고에서 보았듯이, 사물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사물도 의미를 내포하게 될진대,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인간이란 숫자로 환원(붕괴)될 수 없는 의미의 덩어리가 아니겠는가? 인간을 어떻게 시험 점수로 붕괴(환원)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각자에게 의미 있는 행위가 사회적 의미로 확장된다. 개인과 조직과 사회는 결코 숫자로 붕괴(환원)시킬 수 없다. 나는 시험성적으로 서열화하는 한국식 교육이야말로 아이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시험 점수에 목을 매는 저 비참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더구나 학교를 졸업하면 아이들은 성인이 되고 노동시장에서 가격으로 환원되는 노동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낙연의 민주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완화하는 바람에 연간 평균 2천4백 명이 노동현장에서 사망하던 것을 1천2백 명만 죽을 수 있도록 줄였다는 것이다. 이낙연과 민주당 지도부의 머릿속에 인간은 그냥 통계 숫자에 불과한 존재다. 자재창고에 쌓인 부속품처럼.
▶ 그런데 왜 나는 고위공직자 또는 그 후보들을 숫자로 비교하는가?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점수로 서열화하거나 계급화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차별화하여 경쟁시켜서도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왜 고위공직자의 역량을 진단하여 그 결과를 숫자로 표현하고 서로 비교하여 서열화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영재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평범하게 태어난다. 각기 다른 신체적 특성만큼이나 재능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고,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각자가 타고난 특성에 적합한 자리에서 일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더러 프리미어리그에 가서 뛰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손흥민더러 소설을 쓰라고 다그친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본인에게도 괴로운 일이겠지만, 인류의 문명을 퇴보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작업은 고위공직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여 그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내가 나경원이나 안철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아주 큰 오해다. 나는 누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잘못된 지위에서 잘못된 역할을 맡아서(mispositioned)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히고 우리 공동체를 퇴보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성취예측모형》은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우리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이 모형을 고위공직에 적합성이 낮은 사람들이 더 이상 공적 권력의 자리를 탐하지 않도록 알려주기 위해 만들었다.
여기 나오는 숫자는 물론 점수로 이해해도 괜찮다. 플러스 점수는 확률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어차피 과거의 행동은 미래에 재현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높은 숫자일수록 공직에 적합하다는 의미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 대해 확률로 밖에 말할 수 없다. 확률로 해석할 경우, 마이너스의 점수는 확률이 제로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정직성실성 등 역사의식 또는 열린 지평을 나타내는 역량요소가 지속적으로 반대방향을 향하는 경우에는 마이너스 점수가 나온다.)
▶ 국가적 수준의 인사조직이론이 없다
지금까지 공직자들의 적합성을 평가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관, 애국심, 충성심 같은 파시즘적(제국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거나, 도덕성을 점검한다는 이유로 사생활을 들춰내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왔다. 그 결과 우리 정치권은 인류문명이 진보하는 것만큼 진보하지 못했다.
개인의 사생활을 들춰내는 자들이 가장 비열한 인간이다. 범죄행위가 아닌 한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해야 할 영역이다.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우리나라는 지금 사생활과 공생활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등 전근대적인 인사조직이론에 근거한 인사평가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다.
국회의 인사청문회는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다. 국회의원들 수준이 너무나 한심하다. 어떻게 저런 인간들이 국회에 진출했나 싶다. 누가 저런 저질스런 인간들을 뽑았나? 행정부도 사법부도 일하는 걸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고위공직에는 가당찮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이런 현상을 참을 수 없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의 인사조직이론이 전근대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1996년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했고, 이제는 G7이라는 최선진국 클럽에 가입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걸로 요즘 국뽕이 한창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부문 몸뚱이만 커졌을 뿐, 우리 공직사회는 무능하고 썩었고 비효율적이다. 아직도 매년 2천4백 명의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죽는다. 신생아 출생률은 최악의 수준이다.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해져 중산층은 거의 사라지고 인구의 40%는 빈곤층으로 내몰렸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입법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고(mispositioned),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의 고위공직자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under performed)
이것은 국가적 수준의 인사조직이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무튼,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
각자 자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한 일꾼으로서 제 역할은 못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온갖 술수를 쓰고 있다. 우리는 고위공직자들 중에 누가 적합한 사람인지 가려낼 수 있는 〈사람 보는 안목(사보안)〉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 《성취예측모형》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성취예측모형》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대상자의 과거 공적(公的) 활동과 그 성과를 일일이 찾아야 한다. 이 작업은 노가다에 가깝다. 99% 육체노동이고 이 노력을 계속하게 하는 1%의 영감(靈感)이 필요하다. 아무도 이 중차대한 일을 하지 않는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