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주년을 기념하며
2022-07-10_온갖 기념일에 대하여
■ 과거의 가난은 축복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어떤 명절도, 어떤 기념일도 챙겨본 적이 없다. 수학여행도 가본 적이 없다. 이것은 어머니의 생존방식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분단과 전쟁을 통과하면서 강원도 두메산골의 가난은 이재명 의원이 어린 시절에 보냈던 열악한 환경보다 나았을 리가 없다.
나는 실제로 태어난 해보다 한 해 늦게 출생신고가 되어 있다. 그때 시골에선 대충 그랬다. 영아사망률이 높은 시대였으니까. 그 시절은 봉준호의 〈기생충〉보다 못한 환경이었다. 막내딸인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와 학교에서 총명하다고 인정받았음에도 더 진학하지 못했다. 오빠들이 모두 사회주의자가 되어 이북으로 넘어갔기에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여자가 집안 살림이나 배워서 시집가면 됐지 무슨 공부를 하느냐는 시대였다. (이 얘기는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안도 의주에서 부농의 자식이었으니 압록강에서 스케이트 타면서 하모니카나 불면서 무위도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평양에도 유학하면서 잘살고 있었다고 한다. 재산이 좀 있는 집안에는 대개 친척들 간의 재산싸움이 있듯이 장남인 아버지도 젊은 시절 그런 내홍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방을 맞았고, 이북에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작업이 벌어졌다. 제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남한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아마도 하모니카 실력으로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이북에서 살았던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다. 죄다 간접적으로 들은 얘기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를 만나 대충(?) 네 명의 자식을 낳았다. 왜 대충 낳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 시절은 그냥 그랬다. 세상에나! 먹고살 게 없었음에도 그랬다. 첫째와 막내가 딸이고, 둘째와 셋째가 아들이다. 누님은 장로교 목사 부인이 되었고, 형님은 평생을 교사로 봉직했다. 여동생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잘살고 있다.
■ 어머니는 모든 것에 진지했다.
누님은 1960년대 춘천에서는 날리는 수재였다. 시골에서 여자애가 대학을 간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자도 온전한 4년제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보다 여자가 약자라서 더 교육받아야 업신여김을 덜 받지 않느냐는 합리적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더 공부하지 못한 한이 맺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머니는 누님이 믿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성경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박식했다.
그러자 집안의 모든 허례허식을 폐했다. 심지어 생일, 명절, 제삿날은 물론 설날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날이 평등해졌다. 시간만 평등해진 것이 아니라 집안의 남녀노소까지 과도할 정도로 평등해졌다. 명절이고 기념일이고 제삿날이고 뭐고 다 똑같은 날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모든 시간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아침잠이 없었던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다녀온 후, 자식들 머리맡에서, 이담에 훌륭한 사람 되라고 침을 튀기며 기도했다. 얼굴에 튀는 침을 막으려면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야 했다. 나도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중고등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성경의 대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목사의 설교가 정말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도 내가 중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은 못됐다. 이 딱한 사정을 안 김관수 목사는 어머니더러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다니도록 해야 한다며, 교회의 김재영 장로가 나에게 장학금을 주도록 했다. 나 이후에도 그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김 장로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서울에도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더 큰돈을 벌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울의 조용기 목사가 하는 교회로 옮겼다고 들었다. 그다음 소식은 못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베풀어준 은혜로 나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번듯한 4년제 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포기했다.
어머니의 평등 관념은 일반인과는 달랐다. 사회적 약자가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는 딸 둘은 온전한 4년제 대학을 온전한 방식으로 제대로 다녔지만(과외나 알바를 하지 않고 다녔다는 뜻이다), 아들 둘은 모두 2년제 초급대학을 나왔다. (어머니가 일부러 역차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돈을 배분할 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아들들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대학 가는 것을 포기한 나는 집에 있던 헌책을 모아 시내 서점에서 휘문출판사(?)의 5권짜리 《니이체 전집》과 바꿨다. 왜 신이 죽었다고 말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읽어도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 고교졸업 실력으로 니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2000년대 들어 출판사 책세상에서 21권짜리 《니체 전집》이 나올 때까지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니체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 것은 한겨레신문 고명섭 기자가 쓴 《니체극장: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김영사, 2012)를 통해서였다.
■ 춘천교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4년제 대학이 아니면 대학을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빈둥거리면서 책만 보는 놈팡이를 볼 수 없었던 어머니는, 내 고집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담임선생님과 짜고 2년제 초급대학이던 춘천교대에 내 입학원서를 넣었다. 요즘은 교대 입학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었지만, 당시에는 입학원서만 넣으면 합격했다. 등록금도 없고, 학기 중에는 심지어 용돈도 줬다.
1960~70년대는 인구가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라 초등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는 그렇게 교대에 입학했다. 좋은 점은 있었다. 졸업 후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복무하면 군대 3년의 복무기간을 대체해준다는 것이었다. 2년간 여름방학 동안 부사관훈련소에 입소해서 교육받으면 졸업과 동시에 제대하는 RNTC 제도였다. 나는 그렇게 부사관 군번을 받았다.
교대에서 공부할 내용은 거의 없었다. 춘천교대를 7년간 다니다 졸업했는지 못 했는지도 모르는 소설가 이외수의 이름이 회자하던 때였다. 그 후 이외수 선생의 소설은 거의 다 읽었다. 특히 《꿈꾸는 식물》은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아무튼 당시 교수들 이름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교육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분명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내 강의를 듣는 현직 교사들이 많다.
나중에 한양대 교수가 된 이승훈 시인의 문학 수업은 인상에 남아있다. 얼마나 흥미로웠는지 내가 직접 시를 써서 연구실로 찾아가 코멘트를 받기까지 했다. 이래 봬도 중고교 시절에는 가난한 문학소년이었다.
내가 요즘도 페친 김주대 시인과 류근 시인의 글을 빼놓지 않고 읽는 이유는 시인에 대한 동경(憧憬)이 머리 한구석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전이 된 김수영 전집 2권도 반복해서 읽지만, 존경하는 김정란 시인의 시집도 읽는다.
춘천교대 도서관은 고교 시절과는 차원이 달랐다. 책을 맘대로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가.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 죽치고 있었다. 제목을 보고 끌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나는 점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다.
춘천교대를 졸업하고 서울 어느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지방교대를 졸업하면 그 지역으로 발령받아야 하는데,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들에게 서울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하는 제도의 혜택을 보았다. 나는 학교 공부라고는 한 적이 없는데, 성적이 좋았던지 나를 서울로 보냈다. 하긴 교대 다니면서 공부하는 애들을 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모두 그랬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한 나는 서울이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았다. 콧속으로 들이닥치는 매캐한 냄새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70년대 청량리역 주변은, 청정한 북한강과 맑은 공기에 파묻혀 있던 춘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는 탁했고 환경은 더러웠다. 충격적이었지만, 서울 사람들은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나도 여기서 버텨야 했다.
■ 그렇게 아내를 만났다. 45년 전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주저리를 떨었다. 교사 2년 차가 되자, 서울교대를 갓 졸업한 여교사들 10여 명이 대거 발령받아 왔다. 총각 교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나 남자나 ‘외모가 권력’이다. 외모가 눈에 띄는 여교사는 총각선생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더 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야간대학을 다녀야 했기에 여교사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3층에 있던 내 교실에서 창밖으로 어느 여교사가 녹색 계열의 위아래 정장을 입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 하교지도를 끝내고 자기 교실로 가는 길이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외모가 주는 권력의 아우라’는 없었지만, 언젠가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 같은 학년 담임이 되었다.
운명적으로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관심이 끌렸다. 말을 하면 할수록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신뢰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단점까지 다 포용한다는 의미다. 내숭을 떠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남자든 여자든 내숭 떠는 인간은 멀리해야 한다. 외모의 아우라가 있는 애들은 반드시 내숭을 떤다. 내숭이 있느냐의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이 바로 ‘사람 보는 안목’이다. 남녀 간의 신뢰는 사랑의 감정을 낳는다. 우리의 신뢰는 사랑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독일 문학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야겠다.
“호감을 열정으로, 열정을 의존으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 개인을 도취상태로 몰입시키면서 때로는 당사자, 즉 사랑에 빠진 자의 이성적 판단능력을 제한한다. 사랑은 아픔을 낳는 행복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아픔이다.”(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사로잡힌 영혼》, 빗살무늬, 2002, 123쪽)
이렇게 우리는 사랑의 아픔과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희망을 공유하게 되었다.
■ 한국은행과 독일대학
그사이 나의 교사 생활 5년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기간이었다. 그렇게 성균관대 경영학과(야간)를 졸업했다. 교육공무원으로서 야간수업을 들으러 혜화동에 도착하면 늘 최루가스와 깨진 보도블록 덩어리가 나뒹굴었다. 나는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했어도 경영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 수업이 부실해서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조금 더 잘 가르치는 곳으로 옮겨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실망스러웠다. 학습 내용도 거의 같았고 배울 것도 없었다. 미국엘 가야 제대로 경영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누군가로부터 한국은행에 취직하면 일하면서 공부도 시켜주고 필요하면 해외유학도 보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정보는 맞는 것도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행 입행시험을 쳤다. 엄청 어려운 문제였는데, 골라잡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계속 써야 하는 문제였다. 그때까지 그런 시험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독일대학 졸업시험과 비슷했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거쳐 1981년 신입행원이 되었다. 대학원을 계속 다니느냐 마느냐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크게 배우는 것도 없는데, 그저 학벌 세탁용으로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한은 월급은 교사 시절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그렇지만 결혼을 위해서는 전세자금이 필요했다. 상업은행에서 250만원 대출을 받았다. 1982년 7월 10일,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처럼, 명절도 생일도 기념일도 없는 평등한 시간이 벌써 40년이 흘렀다.
한국은행은 나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통화금융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알게 했고, 은행경영의 기초지식을 쌓게 해주었다. 관료조직의 운영시스템이 갖는 비효율성을 연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고, 이 연구 결과들을 온 임직원들에게 가르치도록 허용했다.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나에게 독일연방은행에서 연수받을 수 있도록 했고, 유학의 기회까지 제공해주었다.
독일대학과 독일 사회가 나의 사상과 철학, 학문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어준 학교였다면, 한국은행은 내 삶을 지탱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친정과 같은 곳이었다. 돌아보면, 한국은행이든 독일대학이든 훌륭한 선배와 스승, 나를 도와준 친구와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 계속 이어질 다음 세대를 위하여
아내는 나의 유학 생활을 돕기 위해 교사를 사직하고, 아이들에게도 독일 생활과 독일교육을 경험하게 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좋은 삶의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귀국한 후 다시 임용시험을 거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예순의 나이가 되자 힘들었는지 명예퇴직했다. 아내는 명확한 자기만의 생각이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포용적인 성품을 드러낸다.
우리는 딸과 아들을 낳았다. 딸은 영국대학을 마치고 런던의 유럽계 투자은행에서 일하면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 영국 청년과 결혼해서 런던에 살고 있다. 작년에 아들을 낳아 이제 겨우 두세 발을 뗀다. 아들은 미국대학을 졸업하고, 증권사, 은행을 거쳐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고 언젠가 결혼할 것이고, 자식을 낳아 우리의 대를 이어갈 것이다.
내 자식들은 일찍이 부모의 그늘을 떠났다. 각자 타고난 재능에 맞는 선박을 만들었고 이미 망망대해를 항해 중이다. 어디에 기착하고 궁극적으로는 어디에 도착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세대는 부모를 봉양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야 하는 양쪽에 낀 세대였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대폭발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는 훨씬 더 축복된 삶을 살았다. 우리의 자식들과 그 이후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 세대가 더욱 힘써야 한다. 세계 최악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보여준 나라가 미국인데, 한국은 지금 미국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출생률 0.8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망해가는 길로 추락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패한 친일독재세력”인 국민의힘만의 문제가 아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양아치들의 집단인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어떤 매력적인 비전도, 전략도, 능력도 없는 늙은이들이 정치판을 휘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판의 구조와 시스템이 잘못 설계되는 바람에 유능한 정치인은 사라지고 오로지 쭉정이 같은 인간들, 내숭 떠는 인간들만 득실거리게 되었다. 이제 이들 모두 심판해야 한다.
■ 그래서 다시 소명(召命)을...
내 전공분야를 살려 정치인의 유능성과 무능성을 분별할 수 있도록 그 지침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 정치판에 대한 민주연구원의 분석이나 정치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서 나는 매우 표피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왔다. 선거패배의 원인을 조국사태, 추윤갈등, 쇄신부족, 지도부의 리더십 부족, 공천-공약-캠페인 실패, 민심과 당심의 괴리, 전략 실종 등의 그럴듯한 용어로 분석하고 있으나, 모두 허망한 분석이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연구다. 이것은 현상이고 나타난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물론 이런 데이터와 정보의 분석도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치할 뿐 아니라 충분하지도 않다.
핵심은 그런 현상과 정책을 정치인들이 만들어 사리사욕을 위해 활용한다는 점이다. 핵심을 비켜난 연구는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누가 왜 어떻게 그런 멍청한 현상과 정책을 만들어냈느냐는 것을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은 문재인 자신과 이낙연,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고위공직자들이었다. 이들이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잘못은 엉뚱한 사람들이 저질렀는데 고통은 온 국민이 당하고 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내가 늘 말하지만,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정책은 잘못이 없다. 잘못된 현상이나 정책을 만들어 활용한 정치인이 잘못이다. 내숭 떠는 인간들 말이다. 그게 누구인지 찾아내어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사회적 심판을 내려야 함에도, 정치평론가나 정치학자들은 그 잘못된 정치인을 지목하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간다. 징계받아야 마땅한 정치인들은 희희낙락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나에게 남겨진 일이 그것이 아닐까 싶다. 정치판에서 과연 누가 유능하고 누가 무능한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제시해야 하는 일이 경영학자로서 내가 해야 할 남은 생애의 소명(召命)이 아닐까 싶다.
(후기)
아들이 초대해준 결혼기념일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