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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Sep 08. 2020

교육을 얘기하고 싶다(3)

능력주의란 무엇인가?

1. 능력주의 사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신분과 지위의 세습주의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은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산업혁명이 계기가 되었다. 공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적정한 공교육을 통해 산업노동력을 배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1870년 최초로 교육법을 제정하고 초등학교 공교육을 시작했다. 공무원 채용을 위한 시험제도가 도입되었고 시험성적으로 승진 여부를 결정했다.     


이런 사회현상을 관찰한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15~2002)이 쓴 『능력주의』*라는 풍자소설 때문에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에 처음 출간된 이 소설의 제목은 『The Rise of the Meritocracy』**였다. 1870년부터 2034년까지의 현실과 상상을 조합한 소설인데, 출간되자 당시 7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수십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 이 책은 능력주의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등장하는 최초의 원전이다. 내가 원전을 읽다가 내용이 어려워 포기하기를 여러 번 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영국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최근에 번역본이 나와서 다시 한번 더 훑어봤다.      


마이클 영은 능력(merit)을 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와 노력(effort)으로 정의했다. 지능지수(IQ)가 높은 사람의 노력하는 정도가 곧 능력이기 때문에 능력은 쉽게 측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에 유행하던 IQ 테스트가 능력의 중요한 요소였다. 곧바로 시험성적이 능력을 대체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제도를 채택했고, 우리나라도 역시 그렇다.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시험성적이 곧 능력의 보증수표가 된 것이다.     


잘 알다시피, 능력주의 체제는 많은 장점이 있다. 귀족들이 세습에 의해 권력을 독점하는 행태를 타파하고, 능력이 검증된 소수의 능력자가 국가를 운영한다는 점에서 국가운영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능력주의 체제는 공직에 나아가는 수단이었던 연줄이나 뇌물 등과 같은 정실주의를 사라지게 했다. 물론 이런 정실주의와 뇌물관행은 아직 남아 있지만, 권한과 책임이 큰 지위로 나아가는 데 정실주의가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믿음은 확고해졌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데에는 개인의 능력이 유일한 잣대여야 한다고 믿는다. 능력주의가 농업시대를 거쳐 산업혁명이 일으킨 산업사회의 특징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2. 그런데능력주의 체제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핏줄과 뇌물로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일부 후진국들을 우리는 비웃는다. 대한민국은 그런 국가체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민이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된 능력 있는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시험성적으로 엘리트 집단에 진입하는 능력주의 체제에 “만세, 만만세”를 외친다. 그럼에도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 체제가 펼치는 암울한 미래를 풍자적으로 예감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능력주의 체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같은 자유, 평등, 연대, 공정, 정의와 같은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왔는가? 능력주의에 기대했던 개인적 수월성과 사회적 책임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발전했는가? 대답은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퇴보했다는 것이다. 왜냐? 능력주의 체제는 엘리트 집단에 의해 사회를 초토화시키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이미 경험해왔다. 판검사집단, 고위공직자집단, 국회의원집단, 교수집단, 언론인집단, 재벌가문 등과 같은 소위 지식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엘리트집단이 창조적 소수로서 혁신을 일으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일조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이 기대했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채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제도를 통해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기득권층으로 진입하기 어려워지고 오히려 더욱 불공정한 계급사회가 되었다.      

마이클 영이 예견했던 대로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는 디스토피아가 된 것이다. 판검사집단은 물론 이제는 의사집단까지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국민을 인질로 잡고 진료를 거부하고 있다. 의사들의 저 몰지각한 행태는 엘리트집단에게 우리 사회가 너무나 많은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들은 그 특혜와 특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아래 글을 참조할 것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3599999234084      


이들은 국회의원집단과도 또 다르다. 의회는 4년마다 심판을 받지만, 의사집단은 마르고 닳도록 특혜와 특권을 누린다. 같은 의료인이라도 의사와 간호사의 계급적 차별은 넘사벽이다. 그들은 합법적인 억압과 착취 관계에 놓여있다. 교수와 시간강사도 마찬가지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차별 또한 엄청나다. 일단 엘리트집단으로 들어가면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과 특혜에 조그마한 스크래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조금의 사회적 책임감도 없다. 의사들이 저지르는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판검사 집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번 사태를 통해 의사집단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이런 사회를 서계차경(序階差競) 사회라 부른다.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서열화하고, 계급화하고, 차별화하고 경쟁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완전히 사라진 사회, 승자독식·약육강식의 사회가 된다. 시험성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주의 체제가 이런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이것뿐인가?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촌, 재벌과 대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중소기업과 영세기업, 1등 시민과 2등 시민, 일류대학과 나머지 이삼류 대학으로 계급화되어 있다. 이 거대한 계급화 원리는 다시 미세하게 아파트 평수만큼이나 세분화되어 사회적 계급으로 자리매김된다. 하위층 시민은 상위층 시민의 하인노릇을 해야 한다. 계급주의적 억압과 착취가 만연한 사회가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에 해롭다고 말한다.     


*** “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고 가장 많은 보상을 받는다. 능력에 따라 엄격한 위계질서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이다. 이는 처음에는 매우 공평하고 공정한 시스템처럼 느껴지지만 점차 무자비한 제도로 변질된다. 능력에 따라 엘리트로 분류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고귀한 지위를 얻은 그들은 완벽하고 완전하게 사회를 통제한다. 반면 시스템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 사람들은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채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항거할 능력 또한 영구적으로 박탈당한다. 이는 마치 <암울한 디스토피아> 같다.” ***

스티븐 J. 맥나미, 로버트 K. 밀러 Jr. 『능력주의는 허구다』, 김현정 옮김, 사이 2015, 334~335쪽)     


3. 알겠는데그래서 어쩌라고?     


이제 우리는 능력주의라는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오로지 시험성적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체제로 운영된다면 더 이상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아니, 그럼 시험성적 말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영미식 교육과 그 제도를 혐오한다. 그들은 교육을 상품으로 개발해서 학교라는 시장바닥에서 판다. 학생들은 그 시장에서 입맛대로 상품을 골라 산다. 그 상품의 가격만큼 유명한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대학에서 파는 교육상품을 산다. 비쌀수록 좋은 상품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졸업한 후에는 그 상품가격에 맞은 수입을 보장하는 기업에 취직한다.      


이 순환사이클을 지금까지 돌린 결과는 어떤가? 철저한 계급주의 사회가 되었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아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다. 엘리트집단이 미국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학교가 교육을 독점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학교는 시험성적을 매기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더더욱 아니다. 학교의 역할은 이미 20세기 중후반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힘(합리적 사고, 비판적 사고, 추론적 사고 등)을 기르기 위해 존재하는 공적 기관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학교는 가르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능력주의라는 미명하에 학교가 아직도 시험성적을 올려주는 기관으로 남아있다. 그것도 못미더워 사립학원에서 비싼 상품을 산다. 우리가 잘 아는 숙명여고 교무부장 선생님과 그 두 딸 사건은 정말 슬픈 이야기다. 이들이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들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혁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 중요한 교육 얘기는 다음 회차에 계속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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