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quebrune Cap Martin, 보석같은 몽돌 해변 휴양지
Le Corbusier epitaph 르꼬르뷔지에(이하 Corbu 꼬브)의 묘비명을 생각한 길에 꼬브의 묘가 있는 아름다운 해안을 품은 작은 프랑스 도시에 대해 적어 봅니다.
Roquebrune Cap Martin 로크브륀 캡 마르탱은 프랑스 여행을 할때 많이 찾는 곳 중 각종 축제와 영화제로 일 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Nice 니스에서 차로 1시간 안쪽의 도시국가 Monaco 모나코를 지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프랑스 남동부 지중해 연안의 로크브륀 캡 마르탱 Roquebrune Cap Martin 기차역에서 언덕방향으로 1.5km 안에 Cimetière communal Roquebrune Cap Martin 로크브륀 캡 마르탱 공동묘지내에 Tombe de Le Corbusier 꼬브의 무덤이 있고 역에서 해안선을 따라 1km가 못되는 곳에 그가 마지막 8년을 보낸 4평짜리 오두막, cabanon 카바농이 있습니다.
로크브륀의 날씨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기후대가 달라지는 것처럼 아열대의 달근한 꽃향기가 계속 퍼집니다.
굵은 대가 휘어져 축 늘어진 용설란이나 상쾌한 향을 뿜는 유칼리 나무, 한창 푸르른 아칸더스 나무가 쑥쑥 자라 덤불을 이루는 캡 마르탱 절벽을 따라 얇은 선처럼 둘러진 오솔길을 걷다보면 표지판 하나 없이 서있는 작은 나무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곳이 주인 이 사라진지 반세기가 넘은 한변의 길이가 3.66m, 4평(16㎡), 천정 높이 2.26m의 꼬브의 카바농입니다.
꼬브는 남프랑스의 작은 식당의 구석자리에서 1951년 45분만에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줄 작은 여름별장을 스케치하며 그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가 시작 되었습니다.
커다란 정사각형을 그린 후 퍼즐을 짜맞추듯 4개의 직사각형과 1개의 정사각형으로 쪼개고 작은 직사각형 안에 다시 여러 개의 사각형을 그려넣었습니다.
크고 작은 사각형의 조합으로 보이는 이 스케치는 지중해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벽 암석 위에 세울 별장의 기초 도면이었고 쪼개진 직사각형은 각각의 기능을 담은 공간이 되고 그 속의 작은 사각형은 가구가 되었습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정사각형은 이 기능을 아우르는 집으로 집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방 주변으로 장대하게 흐르는 지중해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연필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45분만에 그려진 스케치 속의 별장 ‘카바농’은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의 절벽 위에 세워졌습니다.
카바농에는 샤워시설과 부엌이 없어 외부에 수도시설을 끌어올려 샤워를 했고 식사는 바로 이웃한 Etoile de Mer 불가사리 식당에서 해결했습니다.
불가사리 식당의 주인, Thomas Rebutato 토마스 레부타토는 카바농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한 사람입니다.
1947년 파리 건축가 장 바도비치가 소유한 현대적인 E-1027 옆에 1000m² 규모의 부지를 마련할 기회가 생깁니다.
세관원들이 지나가는 길 아래 바위까지 경사진 이 부지에 토마스 레부타토는 25~30m² 크기의 오두막 여섯 채를 짓고 그중 다섯 채는 팔고 한 채는 자신이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니스의 건축가에게 연락하여 1948-49년에 프로토타입을 제작합니다.
1949년,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오두막 프로토타입에 투자하여 레스토랑으로 개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L’Etoile de Mer - Chez Robert 에뚜왈 드 메르 - 셰 로버트'가 탄생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에뚜알 드 메르 바로 옆에 카바농을 배치하며 레부타토스의 동의를 얻은 후, 두 건물 사이에 통하는 문을 설치했습니다.
카바농이 완공되자 르 코르뷔지에는 입구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카바농과 에뚜왈 드 메르 사이문에 설치된 벽의 반대편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또 다른 그림, 레부타토 가족을 그려 넣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사망한 직후인 1965년, 토마스와 아내 마거리트는 레스토랑 사업을 중단하고 바의 손님과 캠핑 유닛의 숙소를 빌린 휴가객만 맞이했습니다.
토마스는 1971년 2월에 사망했지만 바와 임대 숙소는 1984년까지 마거리트의 관리 하에 계속 운영되고 있다 레부타토 가문의 기부로 2000년 9월 레투유 드 메르와 캠핑 유닛 전체가 Conservatoire du Littoral 리토르 음악원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카바농 바로 옆 건축물이 E-1027인데 카바농에 비해 인지도는 거의 없습니다.
캡 마르탱 역 바로 앞이 E-1027의 방문자 매표소인걸 감안한다면 당혹스러울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죠.
E-1027는 오랫동안 같은 곳에 자리한 르 코르뷔지에의 카바농에 가려 있는 이 보물은 선구적이고 감각적인 모더니스트 건축물입니다.
빌라 E-1027은 1926~29년 아일랜드 디자이너 Eileen Gray 아일린 그레이가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장 바도비치와 함께 여름 별장으로 설계한 주택입니다.
특이한 작명방법은 알파벳에서 이니셜의 위치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Eileen은 E, Jean Badovici.의 J는 10, B는 2, Gray는 7입니다.
이 모더니스트 빌라는 프랑스 Riviera 리비에라(아름다운 해안선의 메타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테라스에 2층으로 지어졌으며, 유명한 E-1027 사이드 테이블을 비롯해 그레이가 디자인한 빌트인 가구와 별도의 가구로 꾸며져 있습니다.
나중에 인접한 부지에 카바농 휴양지를 짓게 된 르 코르뷔지에는 1938~89년에 바다비치의 손님으로 이 집을 방문하여 자신의 벽화를 추가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재밌는 구술이 존재하는데 아일린을 질투하고 집착하던 꼬브와의 일화입니다.
그는 무단 침입으로 벽화를 그렸는데 이것은 본인보다 앞서있고 뛰어났던 아일린 그레이를 향한 르 코르뷔지에의 질투이자 집착에서였다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건축관련 글로 다시 올려야 할것 같네요.
Gabrielle Bonheur "Coco" Chanel 코코 샤넬은 1928년 로크브륀에 5에이커의 땅을 구입한 이후 10년 동안 그녀는 집의 건축과 디자인을 감독했습니다.
당시 180만 프랑은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샤넬에게는 평온함을 위해 지불한 작은 대가였습니다.
침실 7개가 있는 이 저택은 그녀의 안식처이자 연인이었던 웨스트민스터 2세 공작과 함께 휴양하던 곳이었죠.
샤넬은 자신의 시그니처 의상을 고집했던 것처럼 라 파우사의 건축과 인테리어에 깊이 관여했으며, 파리와 이곳을 오가며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건축가 로버트 슈트레이츠와 만났습니다.
주변 정원에 향기로운 라벤더와 잘 익은 올리브 나무가 있는 이 휴양 빌라는 흥미진진하지만 지루한 여성 패션계에서 샤넬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샤넬은 1953년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사망한 직후 이 저택을 매각했습니다. 출판업자 에머리 레브스와 그의 아내 웬디가 매입하여 클라크 게이블과 그레타 가르보 같은 할리우드 왕족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죠.
웬디 레베스 2007년 사망한 이후 폐쇄되었고 2015년 샤넬 하우스는 이 부지를 매입했으며 마드모아젤의 놀라운 웅장함으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호텔, 박물관 또는 브랜드 전용 공간이 될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지만 코코 샤넬은 자신이 직접 일궈낸 비즈니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회사 역사에 길이 남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Greta Garbo 그레타 가르보, Pablo Picasso 피카소와 Winston Churchill 윈스턴 처칠도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매년 약 3분의 1을 보내며 이곳에서 「영어권 민족의 역사」의 일부를 집필하고 편집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시인 William Butler Yeats 예이츠가 여생을 보내다 1939년 1월 28일 인근 마을 망통의 호텔 이데알 세주르에서 사망하고 꼬브가 묻힌 공동묘지에 1년간 묻힌 후 생전 아일랜드 슬리고 카운티의 드럼클리프에 다시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지만 발굴이 지연되어 옮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제일의 미모를 뽐냈던 Sissi 씨씨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엘리자벳 황후도 이곳에서 1896년부터 2년간 머물렀습니다.
저물어가는 제국을 눈앞에 둔 채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감성과 고민을 함께 품었던 엘리자벳의 삶을 그린, 독일어권 뮤지컬 최대의 흥행작 「엘리자벳」은 고작 열여섯 나이에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간 어여쁜 소녀는 비엔나에서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엄격한 궁정 생활에 적응 못하고 자유를 그리며 방황하다가 서서히 토드(죽음)의 유혹에 빠지는 내용으로 아들의 죽음과 암살이라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60년 세월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방황하던 그녀가 캡 마르탱에서 돌아간 2년 후에 죽음을 맞이하죠.
2022년 뮤지컬 공연때 씨씨는 이지혜가, 토드역은 노민우, 이해준이 맡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 1933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Roquebrune 로크브륀은 ‘갈색 바위’라는 뜻으로 로크브륀 쉬르 아르장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Roquebrune Cap Martin 로크브륀 캡 마르탱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로크브륀 마을은 캡 마르탱(마르탱 곶)의 울창한 초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세성에서 프랑스 Riviera 리비에라의 해안선, 망통과 이탈리아 위의 산, 눈부신 모나코 공국까지 숨막히는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과 프로방스 카운티 사이에 있는 이곳과 바로 옆 Menton 망통의 위치는 중세 시대에 매우 탐나는 곳으로 13세기에는 이탈리아 국경도시 Ventimiglia 벤티밀리아의 영주들이 통치했습니다.
1346년 모나코의 Charles Grimaldi 찰스 그리말디(그리말디 호텔을 세운)가 이 마을을 인수한 후 1848년까지 5세기 동안 그리말디 가문의 소유로 남아있는데 그해 이곳과 이웃 마을인 망통은 레몬 수출에 대한 세금 관련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모나코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두 마을은 스스로 '자유 도시'를 선언하고 Sardegna 사르데냐 국왕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1861년 국민 투표를 통해 프랑스에 양도되며 나폴레옹 3세는 모나코 왕자에게 영주의 권리를 영구적으로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400만 프랑을 지불했습니다.
로크브륀은 다양한 스타일과 시대를 아우르는 멋진 건축물로 유명한 곳으로 건축 유산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중세 건축물과 모더니즘 걸작이 병치되어 수 세기에 걸친 건축 양식의 진화를 강조하는 독특하고 그림 같은 환경을 조성하고 있어 전통과 혁신이 조화를 증명하는 곳으로, 건축 애호가들에게 매력적인 여행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