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지는 문화의 단편에 서서
가을, 그리고 가을의 한가운데 민족의 최대명절인 가장 큰 가윗날, 한가위가 한주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한가위를 준비하는 첫번째가 어쩌면 벌초가 아닐까요.
어제는 선영으로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낮시간은 기온이 많이 올라가는 터라 너~무 양지바른 위치인지라 동트기전부터 준비해서 일출시각인 6시5분부터 딱 한시간 정도 열심히 했네요.
벌초(伐草)란 조상 묘의 풀을 베어 정리하는 풍속으로 금초 禁草라고도 하는데 ‘예초’, ‘금초’라는 말은 다른뜻입니다.
제를 지내고 조상의 묘를 돌보는 한식때의 ‘불을 조심하고 때맞추어 풀을 베어 무덤을 잘 보살피다’라는 의미인 금화벌초 禁火伐草에서 나온 금초禁草는 아직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았고 그 출처도 모호합니다.
예초는 그냥 풀을 벤다는 의미인데, 벌초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묘를 돌본다기 보다 그저 풀을 벤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예기집설에서 언급한 ‘易墓 非古也 역묘 비고야’에서 따온 易墓(역묘)는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단종실록에서 묘를 봉하다라는 의미 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는 말입니다.
일단 예기집설은 예기가 아니라 원나라의 진호가 쓴 예기의 주석서이고 그 의미도 은나라이전 시대의 봉분 없는 평장시 초목을 벤다는 의미로 지금의 벌초와는 다른 의미 입니다.
그러니 발음이 맘에 들지 않지만 ‘벌초’로 써야 할듯합니다.
8월에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친다.
제사 안 지낸 것은 남이 몰라도 벌초 안 한 것은 남이 안다.
추석 전에 소분(掃墳;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돌보는 일)을 안 하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한다.
벌초자리는 좁아지고 배코자리는 넓어진다
속담의 비유를 보면 벌초는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화장이 주류였기때문에 벌초는 매장문화의 하나지만 묘를 쓰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랜 풍습은 아닙니다.
매장 제도가 확산된 것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진 조선시대이고 사림파가 득세한 15세기부터 확산세가 커졌던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고향에 남은 문중 사람들이 벌초를 하는 게 일반적으로 외지의 친척들은 감사 의미를 담아 용돈을 두둑이 건네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태도 잠깐, 최근엔 벌초 대행업자에게 맡기는 사례가 늘어나고 도시에 살던 사람이 직접 벌초에 나섰다 공연히 벌집을 건드리는 등의 사고나 당하는 것도 벌초 대행 문화를 확산시켰습니다.
어쩌면 추석 전 1, 2주 동안 주말 고속도로는 벌초 행렬로 만원사례였지만 오래지 않아 사라질 풍경이 될 것입니다.
망자를 봉분 대신 납골당으로 모시고, 수목장 등 다양한 장례 문화도 확산되고 있어 벌초도 지나간 풍속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사라지고 나면 그리워질 것이고….
벌초, 그냥 남들 다하는 일이지만 마치고나니 밀린 숙제 하나를 끝낸 것처럼 홀가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