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comes around, goes around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간을 사랑하는 감독이다. 놀란은 누구보다 시간을 엇갈린 배치를 사랑한다. 그의 영화는 단 하나도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계속 어긋나게 배치된다. 소재도 마찬가지다. 메멘토와 인터스텔라는 시간을 소재이자 장치로 훌륭히 사용한다.
테넷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리학과 엔트로피에 기반해 시간을 영화 안에 녹여냈다. 영화는 비선형적으로 흘러가고, 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가 교차 편집된다.
하지만, 함정이 하나 있다. 놀란은 특수한 소재에서 보편성을 누구보다 가장 잘 이끌어내는 감독이다. 인셉션은 트라우마를, 인터스텔라는 가족의 사랑을 이끌어낸다. 즉, 특수한 소재에 집중하다보면 그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놓치기 마련이다.
테넷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간과 물리학이라는 특수성을 배제한 채 영화를 보고자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what comes around, goes around. 모든 것은 사필귀정으로 흘러간단 뜻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주인공은 극중에서 유일하게 타인을 위해 선한 행위를 계속 하는 사람이다. 오페라하우스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위해 폭탄을 해체하고, 팀원들을 위해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캣을 살리고자 한다. 캣의 자유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걸고, 살리고자 과거로 돌아간다. 심지어 그녀를 먼발치에서 지켜준다. 이러한 주인공의 선한 행위는 사랑이 아닌 그저 선한 마음에 기반했을 확률도 있다. 왜냐고? 항상 선하게 행동했으니까. (펀쿨섹)
사토르는 반대다. 자신이 갖지 못하면 부수고자 한다. 자신이 사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부수고자 한다. 타인을 위하지 않고, 지극히 자신의 이기적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다. 극중 주인공의 이름은 '프로타고니스트'인데, 이는 연극에서 주인공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극을 이끌어가는 사람을 뜻한다. 반대어로 안타고니스트가 있다. 프로타고니스트에 대적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사토르는 주인공 프로타고니스트에 반대에 있는 안타고니스트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주고, 미래가 현재와 과거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목격한다. 미래에 한 행동이 과거를 구하고, 과거의 행위가 현재를 구한다. 과거에서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고, 미래에서 과거를 추측한다. 어쩌면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본 채로 깍지 끼는 자세가 테넷의 상징인 점도 과거와 현재가 얽혀있음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과거와 미래가 물샐틈없이 끼워져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운명 앞에 좌절하는 개인을 그리나 싶을 수 있다. 결국,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된 흐름 속에서 개인의 자그마한 행동이 큰 태풍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마치 실에 연결된 피노키오처럼 우리네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라는 운명결정론적 회의감도 든다.
하지만, 주인공의 대사를 보면 다르다. 모든 세대가 각자만의 해결책이 있다며 사토르를 말리는 주인공과 분노가 절망이 되어 멈춘 캣에게 다시 한 번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찾아준다. 캣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절망에서 일어나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사토르에게 복수한다. 심지어 영화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인공처럼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행동하는데 결국 이게 놀란의 메시지가 아닐까.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미스터리에 빠져든 것처럼 허우적대던 주인공은 분명 수동태였다. 하지만 자신이 해결하고자 능동태로 삶을 바꾸었고, 프로타고니스트 (극을 이끄는 주된 인물) 처럼 행동하니 진짜 프로타고니스트가 됐다. 그가 과거에 한 선한 일은 모두 큰 태풍이 되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도왔다.
선한 행위와 주체성. 운명처럼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내가 지나온 길과 선한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게 아닐까. 내가 한 모든 행위가 미래로 연결된다면, 우리는 더욱 이타적으로 선하게 살 수밖에 없다. 지금 우연처럼 다가온 일도, 축을 바꾸면 필연이었을 것. 댓츠더리얼리티.
요즘따라 그런 생각이 든다. 과거에 살아온 내 삶의 궤적이 하나의 그림이 되고 내 미래의 나침반이 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퇴사를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지금의 일을 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미스핏츠를 하지 않았다면, 대학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다. 결국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나는 이 축을 미래의 관점으로 돌려보지 않았다. 미래의 내가 본다면, 분명히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이타적으로, 덜 욕심부리며 살라고 할 테다.
올곧게 직진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휘어져있는 기찻길처럼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올바르지 못하고, 어느 부분에서 선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더욱 더 무겁게 느껴진다. 선하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도 모자랄 판에 내가 이전에 쌓아둔 업보가 언젠가 나를 갉아먹지 않을지 말이다. 모두를 위한 석가모니는 아닐지언정 내 근처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안식처 정도는 되고 싶은데, 이런 마음이 내 미래를 조금 더 밝혀주길 바란다.
난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 도움을 원하면 그만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란다. 누구를 해하지 않고 싶고, 타인의 잘못됨보다 선함을 볼 수 있기 바란다.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탐욕보다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그동안 저지른 업보와 누도 적지 않을 테다. 그걸 생각하면 항상 목이 옥죄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앞으론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덜 오만하고, 덜 교만하고,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성실하고, 조금 더 착하게 살 수 있기를. 올바름과 그름을 구분하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