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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Dec 18. 2023

한라산 데이트

제주 한달살기(23년 늦여름~)

제주 한달살기 11일차.

 

어머님 찬스로 남편과 한라산 등반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애들 둘을 맡기는 것이 걱정되어 계속 안 가겠다고 했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그만 좀 싸우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어머님은 계속해서 괜찮다며 이 기회에 둘이 바람도 쐬고 데이트도 하고 오라 하셨다.


감사했다. 사실 그런 시간이 너무 갖고 싶었다.


신혼 때는 종종 등산을 다녔다. 집 바로 뒤에 간단하게 다녀올 수 있는 북한산 등산로가 있어서 날씨가 좋은 주말에 집에 있다가 가볍게 다녀오곤 했다. 가끔씩은 아예 버스를 타고 제대로 된 등산로 입구를 찾아가 김밥과 간식거리를 사들고 올랐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서 시장에 들러 전에 막걸리를 먹거나,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었다. 그때 먹는 술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신혼때 자주가던 북한산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둘이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집 근처 식당에서 맘 편히 고기를 구워 먹고 술 한잔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제주도에서도 한라산을 등반하게 될 거라고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에게 등산의 취미가 있었는지도 까먹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어머님이 ‘제주도까지 왔는데 둘이 한라산 다녀와~’라고 하셨을 때 너무 놀랐고 동시에 설레었다. 남편도 내심 기대했는지,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신혼 때 매번 등산화를 사자고 얘기만 하고 구입은 안 했었는데, 이참에 제대로 된 걸 구입하자고 했다. 아침 오픈시간에 맞춰간 서귀포 쇼핑거리에서 아이들은 졸린지 징징대느라 나는 점점 지쳐갔는데, 남편은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신어보고, 움직여서 3번째 들린 매장에서 꽤 맘에 드는 커플 등산화를 구매했다.



등반날 아침, 6시에 조용히 일어났다. 제주도에 와서 보낸 2주간의 시간 동안 가장 일찍 일어난 날이었다. 가방에 먹을 것들을 좀 챙기고, 가져온 옷들 중 제일 편한 옷을 입고, 어제 새로 산 등산화를 신고 나왔다.


숙소를 나와 차를 타고 달리는데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둘이서만 드라이브하며 맞는 제주도의 아침 공기가 너무 상쾌했다.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틀었고, 남편은 자꾸 “아 좀 더 일찍 나올걸”하는 아쉬움의 말을 내뱉었다.

”아우 이미 이 시간에 나온 걸 어떡해. 괜찮아. 지금도 빨라! 걱정 마!”  

평소 같으면 나의 이런 ‘강요하는 긍정’의 말에 삐쭉했을 남편은 “그래!“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나도 좀 아쉬웠다.)


오르기 시작한 한라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가 너무 시원했다.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계곡의 풍경도, 물 흐르는 소리도 너무 좋았다. 파란 하늘에 뜬 달을 발견하고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숨이 좀 차오를 때쯤 데크에서 휴식을 취하며 풍경을 또 감상했다. 우리의 ‘자유시간’도 찍었다.


다시 올라가는 길에 갑자기 뚝.

내가 매고 있던 어머님의 등산 가방 한쪽이 뜯어져 버렸다. 둘 다 놀라면서 동시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저 즐거웠다. 남편은 나와 가방을 바꿔 매면서 이 가방을 언제 처음 봤는지, 엄마 참 독하다며, 가방 하나를 질리게도 오래 썼다는 둥의 얘기를 하며 걸어갔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걸어갔을까. 뚝. 나머지 한쪽도 뜯어져 버렸다. 남편은 결국 두 손으로 가방을 안고 걸었고, 우리는 그 상황이 웃겨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윗세오름 정상에 가까워지자 예상했던 것보다 추워서 오도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실내 휴게공간에 들어가 그나마 약하게 나오는 히터 밑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더웠던 날씨에 이리 추울 것을 예상 못했다. 하필 챙겨 온 음식은 고구마, 빵, 과자. 어머님이 그렇게 챙겨가라 했던 컵라면과 따듯한 물이 아른거렸다. 그래도 둘이 덜덜 떨면서, 이 또한 진-한 추억이 될 것임을 알기에 짜증 한번 내지 않고 한라산에서의 식사 시간을 즐겼다.

하행길에는 엄마와 함께 내려가는 삼 남매와 자주 마주쳤다. 제일 앞에서 중간중간 뒤쳐지는 가족들을 기다리던 막내는 8살이라고 했다. 우리도 첫째 8살쯤에는 같이 등산할 수 있겠다, 언제쯤 애들 다 데리고 한라산을 올 수 있을까, 둘째를 업고 지금도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등의 얘기들을 나눴다.


남편은 기분이 많이 좋았는지 중간중간 만난 8살 꼬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형과 손잡고 가는 걸 지나칠 때, “우와 형아 있어서 좋겠다~”

바위가 많은 냇가를 건널 때, ”아저씨가 손 잡아줄까? “

옆 데크에 앉아 같이 쉴 때, ”방울토마토 줄까? “

”물 줄까?” “형아는 몇 살이야?” “아저씨는 4살, 2살 애기 있어”

고맙게도 8살 꼬마는 혼자 신이 난 아저씨의 귀찮은 물음에도 다 대답해 주었다.

형아랑 내려가고 있는 8살 꼬마




그렇게 우리의 자유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 어쩌면 그동안 둘 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서로에 대한 미움을 만들어내며 싸웠던 건가. 적어도 한라산 등반의 반나절 동안 우리는 매우 사이좋고 화기애애한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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