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여행 Dec 19. 2021

호스피스, 아니 완화치료를 선택하다


"호스피스 병동을 연결시켜 드릴까요?"

의사의 말이 하루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호.스.피.스.병.동.



내가 처음으로 '호스피스'라는 단어를 들은 건 13년전 인도 캘커타였다.

30대 초반 회사를 그만두고 배낭 여행을 떠났었다. 그것도 1년 동안.

그러던 중 인도 캘커타에 들렀다. (* 캘커타는 콜카타로 불리지만 난 지금도 캘커타라는 발음이 더 좋다)


캘커타 하면 두명의 인물이 떠오른다.  

먼저 타고르다. 인도의 시인으로 아시아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캘커타는 타고르의 고향으로 약간 과장하면 타고르의 영향을 받아 지나가는 이들 절반이 '시인'으로 활동할 정도다.  

또 한명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인 테레사 수녀다. 테레사 수녀는 기차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뒤 캘커타 빈민가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캘커타는 지금도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다. 10대 소녀는 교과서 대신  갓난 아이를 안고 길거리에 앉아 동냥을 하고, 바싹 마른 몰골의 릭샤왈라는 자기 몸집의 두배만한 사람을 태우고 맨발로 인력거를 끌고 달린다.  



다시 호스피스 이야기로 돌아가면, 캘커타에 호스피스 봉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테레사 하우스다. 이름에서 알아챘겠지만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만든 봉사기관이다.

그녀의 무한한 헌신에 세상은 감동했다. 그리고 1979년 테레사 수녀에게 노벨평화상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상금조차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1997년 테레사 수녀는 임종을 맞이했고, 당시 전 세계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테레사 하우스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소다.  

원하면 누구나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 호스피스 봉사를 비롯해 가정폭력 희생자, 빈민 아동 등을 돌보는 다양한 봉사활동이 있다. 오로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캘커타에 온 여행자가 대부분일 정도로 테레사 하우스의 인기는 높다. 나 또한 그래서 캘커타에 왔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봉사는 호스피스였다.

임종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이라는 말이 멋있게 보였던지, 호스피스 봉사를 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캘커타 여행자거리인 서더스트리트 게스트하우스에는 밤마다 여행자들이 모여 봉사활동 경험담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난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 종종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지막 시간을 도와주는 일은 분명 슬플텐데, 그들은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던졌다.

"어제 내가 빨래를 해줬는데, 글쎄 오늘 가보니 그 환자가 죽었더라구.  이런 경험 언제 해보겠어"


캘커타의 흔한 거리풍경(좌) 테레사 하우스에 적혀있는 글귀(우)





처음 의사한테 호스피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캘커타의 그 시간이 스쳐갔다.

호스피스 무용담을 자랑하던 그 여행자는 어쩌면 지금도 캘커타의 그 경험을 자랑할지 모른다. 그에게 말하고 싶다.

'호스피는 슬픔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호스피스를 권유받은 환자와 가족에게는 이 슬픔조차 사치였다. 뒤집어진 모래시계처럼 시간이 없다.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의 남겨진 시간을 위해 좀 더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했다.


1. 의사의 말대로 모든 의학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로 옮겨오기

2. 엄마의 가장 편한 공간인 집으로 모셔오기

3.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산에 가서 자연 치료에 도전하기



우리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1번.

고민스러웠다. 호스피스라는 단어가 주는 확정적인 절망감이 싫었다. '호스피스'의 사전적 의미는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임종이 임박한' 이라는 단어로 엄마의 시간을 단정짓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아직 이렇게 살아계신대!


2번. 

처음에 우리가 생각한 방법이다. 몇달간 엄마를 자유롭게 못봤고(코로나라 면회가 까다로웠다), 엄마도 병원생활을 답답해하고 있다. 엄마는 한평생 강하게 살아오셨으니, 가족들과 집에서 다시 생활하면 말기 암쯤이야 이겨내실 것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의 욕심일까.

말기암 환자를 아무 의학 조치도 없이 돌보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말기암의 고통은 상상이상인데, 엄마에게  고통을 주는 게 과연 은 일일까.  


3번.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 산에서 암을 이겨낸 사람들이 많다.

산속 공기좋은 집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엄마는 음식물을 아예 넘길 수 없는 상태다. 콧줄을 잠시라도 빼면 녹색 구토가 나오기 때문에 물조차 넘기기 힘들다. 자연속에서 건강음식을 먹어야 낫는데 그 조차 먹을 수 없다면 산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 또한 패스.



우리는 고통속에서 1번을 선택했다.


다만 '임종이 임박하다'는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엄마의 시간을 하루라도 더 연장 시키겠다 마음먹었다. 그리고 호스피스는 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는게 아니라 말기 암환자의 통증을 완화해주는 완화치료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희망이 보였다.   


운이 좋게도 엄마가 입원한 S 병원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호스피스 시설을 갖춘 곳인만큼 우리는 이제 새로운 치료방식인 완화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엄마와 함께 했던 캄보디아 여행. 꼭 나아서 다시 엄마와 여행을 떠날수 있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