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마흔일곱살의 여름,나는 실크로드 여행을 떠났다.
산시성 성도 시안에서부터 신장자치구의 카슈가르를 지나 카라코람하이웨이까지 이어지는 45일간의 일정이다.
40대 중반에 긴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일단 40대는 바쁘다.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정말 바쁘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모은것도 아니고, 안모은것도 아니다. 뭔가 이룬 듯 하면서도 이룬 것도 없는 나이다. 한마디로 어정쩡하다.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모래와 같이 잡히는 것이 없는 시기다.
챙겨야 할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부모는 병원갈 일이 많아지고, 자식들은 돈 들어갈 일이 많아진다. 일주일 이내 짧은 여행은 몰라도 오래도록 집을 비운다는 건 쉽지 않다. (다행(?)히 나는 자식이 없어 절반은 홀가분하다)
용기를 낸 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내가 챙겨야 할 사람(또는 일)을 내팽개치고 떠난다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필자는 20대에도, 30대에도 1년이상 장기여행을 떠나본적이 있었다. 그때는 용기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40대가 넘어가니 긴 여행은 용기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꾸역꾸역 살다보니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운 좋게도 1년간 휴직 기회를 잡았다. 그것도 기본급의 절반을 받을 수 있는 유학 휴직이다. 대학 때도 유학을 가본적이 없는데 오십을 목전에 둔 나이에 유학이라니.
기관장은 나의 휴직 신청을 수락했고, 가족들은 나의 꿈을 응원했다. 40대의 여행은 용기 보다 주변의 배려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배려덕분에 나는 여행을 겸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보통 유학하면 영어권을 생각한다. 영어, 물론 중요하다. 요즘은 영어 잘한다는게 스펙도 안될만큼 모두들 영어를 잘한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영어를 못하면 평균 이하로 밀려나는 것 같아 불안하다. 너도 나도 영어학원을 다니고,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중국을 택했다. 그 중에서도 시안(西安)이라는 도시다. 중국어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중국에는 오래도록 내가 꿈꿔오던 여행이 있었다.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도전하기 쉽지 않았던 곳, 바로 실크로드다. 시안은 중국 11개 왕조의 수도였던 고대 도시이자 실크로드의 시작점으로, 시안을 모르면 중국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실.크.로.드.
내 안에서 실크로드 여행의 꿈이 자란건 아마 NHK <실크로드>를 본 뒤 부터였을 것이다.
끝도없는 황량한 사막지대를 걸어가는 대상들의 행렬을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기타로의 음악. 이토록 쓸쓸하고 공허한 풍경을 난 여태껏 본적이 없었다. 수십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이 기억은 강렬하게 나의 뇌리에 남았다.
'언젠간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 꿈을 이루는 데 30여년이 걸렸지만, 결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실크로드는 왠지 청춘과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체력적으로야 몸이 쌩쌩한 젊은 시절이 더 좋겠지만, 실크로드만의 감정을 느끼기에는 지금의 내 나이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끝도 없는 사막, 거대한 산맥과 협곡 등 무수한 난관을 맞닥뜨리는 실크로드 여정은 삶의 쓴맛과 단맛을 겪고 아픔과 슬픔이 켜켜히 쌓인 중년의 모습과 더 닮아있기 때문이다.
한 학기 중국어 과정을 수료하고 방학이 되자마자 바로 시안 기차역으로 향했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기록될 실크로드 대장정이 드디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