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여행 - 감숙성 장예
나의 두번째 실크로드 도시는 감숙성 장예(장액, 张掖)다.
장예는 하서주랑(河西走廊, 또는 하서회랑)의 오아시스 도시다.
하서주랑은 몽골고원과 티베트고원 사이의 복도처럼 긴 지형을 말한다. 시안, 천수, 란저우, 장예, 가욕관, 돈황까지 이어지는 약 1,000km의 길이다. 실크로드 여행이 엄두가 안난다면 하서주랑의 도시들을 먼저 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도시간 이동이 편하며, 인프라도 비교적 좋아 실크로드 여행에 자신감을 갖게 해줄 것이다.
장예는 남쪽으로는 기련(치렌)산맥이, 북쪽으로는 바다지린 사막이 있다. 기련산맥은 평균 해발고도 4,000m이상의 만년 설산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기련산맥의 웅장함을 천산이라 칭송했다.
장예는 봄이 오면 산에서 녹은 물이 흑하(黑河)로 흘러들어 비옥해진다. 건조한 사막지대에도 푸른 녹음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장예를 이렇게 표현했다. '눈 덮인 기련산맥이 없다면 강남 지역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도시'라고.
이 오아시스 도시를 사랑한 서양인은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다.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머문 17년 중 1년을 장예에 머물렀다. <동방견문록>에는 장예 시내에 있는 대불사(大佛寺)가 언급되어 있다.
대불사는 서하시대인 1098년에 창건되어 역대 황실의 사원으로 사용됐다. 대불사의 압권은 34.5m에 달하는 거대한 목조와불이다. 와불 발가락 하나가 성인 얼굴보다 크다.
서역을 오가는 상인들과 구도승들은 반드시 하서주랑을 오가야 하는데 장예는 하서주랑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금 장예'로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대불사는 '금장예'의 랜드마크다.
내가 장예에서 예약한 숙소는 '더 실크로드 트래블러스(실크로드 여행자)'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게스트하우스다.
젊은 시절 여행할 때는 무조건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고집했다. 숙박비를 아껴 하루라도 더 여행하는 것이 당시 내 여행 스타일이었다. 4, 6인실은 기본이고 수용소를 방불케하는 20인실 도미토리도 별 거부감이 없었다. 한번 잠에 빠지면 왠만한 소음에도 끄덕없이 잘 자는 편이라, 한방에 몇명이 있던 대수롭지 않았었다.
하지만 40대가 넘어서니 이 또한 달라졌다.
새벽에 누군가 가방싸는 소리, 밤 늦게 들어오는 소리, 씻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에 몇번이나 잠을 깨기 일쑤다. 나이들수록 잠귀가 밝아진다는 말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보니 타인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자는 행위는 여행의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고급 호텔에 머물 정도는 아니지만, 샤워를 마치고 맥주과 안줏거리를 사와 아담한 호텔 방에서 그날의 여행 피로를 푸는 일은 여행 못지 않은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홀로 여행을 하더라도, 진짜 혼자가 되는 공간은 꼭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참 오랜만에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인데, 실크로드 여행자 게스트하우스에는 도미토리가 아닌 싱글룸이 있어 좋았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사장이 영어로 체크인을 도왔다. 중국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다. 중국은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 외에는 영어가 거의 안통한다. 세계 만국어라 생각했던 숫자나 호텔, 아침 식사 등 간단한 단어조차 영어가 안통할 때가 대부분이다.
누군가는 농담으로 말한다. '중국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는게 아니라 일부러 안하는거야. 미국이 싫어서'
이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중국에서는 영어를 쓰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는 게 좋다. 언어 문제가 중국 여행의 난이도를 올리지만 달리 뾰족한 수는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중국에 온 이상 번역 어플을 써서라도 중국어를 해야만 한다.
사장은 유창한 영어로 나에게 어디에 갈거냐고 물었다.
장예에 온 이유는 무조건 칠채산(七彩山)이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여행자가 칠채산을 보러 장예에 온다.
사장은 칠채산만 보긴 아깝다며 마제사라는 석굴도 덤으로 추천했다. 마침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여행자들을 위한 투어차량이 있었다. 사장의 권유대로 아침에는 마제사를, 저녁에는 칠채산에 가보기로 했다.
마제사(馬蹄寺)는 '천리마의 발자국'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어있는 석굴 사원이다. 전설에 의하면 천리마가 이곳에서 물을 마셨는데 이후 천리마의 말발굽 자국이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실크로드는 '석굴'의 길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따라 수많은 석굴이 만들어졌다. 거대한 바위와 암벽이 석공의 집념으로 사원으로 재탄생됐다.
석굴은 고승의 수도 공간이자, 실크로드를 걷는 이들에게 위로의 공간이었다. 척박한 길 위에 만나는 부처님은 다시 실크로드를 걷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마제사로 향하는 길은 황량하고 건조했다. 버스 창밖으로는 한시간이 넘게 메마른 대지가 이어졌다.
'이런 허허벌판에 과연 석굴이 있을까' 싶던 찰나에 눈 앞에 석굴로 가득한 거대한 암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이로운 순간이다. 아무런 조짐 없이 바로 클라이막스가 시작되는 소설처럼 강렬했다.
중국에는 4대 석굴이 있다. 막고굴(돈황), 용문석굴(낙양), 운강석굴(대동), 맥적산석굴(천수)이다. 마제사는 중국 석굴의 대표주자도 아닌데 이렇게 엄청나다면, 4대 석굴은 도대체 얼마나 웅장할까. 앞으로의 실크로드 여행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표를 사서 들어가면 먼저 천불동(千佛洞)이 나온다. 천불은 정확히 천개가 있다해서 붙여진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쓰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천불동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굴도 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굴도 있다.
암벽을 깍아 석굴을 만든 건 인도가 시작이다. 인도 중남부 지역 엘로라, 아잔타 석굴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석굴암에도 영향을 미쳤다. 석굴은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홀로 조용히 수행하며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석가모니 또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굴에서 6년간 수행에만 전념했었다.
천불동에서 다시 5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마제사의 핵심인 '삼십삼천천불동(三十三千千佛洞)'이 나온다.
천불동보다 규모가 한층 더 크다.
이름모를 석공은 저 곳 어딘가에 자신의 몸을 매달아 오랜 시간 암벽을 깍았을 것이다.
때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에게는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뜨거운 불심(佛心)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실크로드를 걷는 수많은 이들은 희망과 위안을 얻었다.
천불동 입구에는 장불전이 있다. 북위시대 만들어졌다. 양 옆에 수많은 불상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불상들이 머리가 잘려나갔다. 1900년대 초 탐험가를 자칭한 도굴꾼들은 마제사 뿐만 아니라 막고굴 등 실크로드의 수많은 석굴을 파헤치고 불상과 불화를 떼어갔다. 그렇게 떼어간 불화는 현재 전 세계 유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천불동은 7층 정도의 높이다. 아래에서 내려다보니 석굴의 모습이 마치 벌집처럼 송송 뚫려있다.
범인(凡人)인 나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천리마의 말발굽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신비로운 풍경은 역시 천리마 정도는 되어야 어울릴 것도 같다.
법당 기와가 공중 암벽위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다.
어떻게 저 곳까지 올라갈까 싶은데, 비밀은 내부에 있다.
굴마다 통로를 만들어 법당까지 길을 만든 것이다. 길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가파르다. 그래서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교대로 가야해서, 시간이 꽤 걸린다. 손을 바닥에 짚고 네 다리로 걸어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은 곳도 많다. 고승들은 아마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 자체도 수행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석굴에 도착했다. 역시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승려들은 적막함과 외로움을 벗삼아 이곳에서 홀로 수행에 정진했다. 달라이라마 3세또한 마제사에 머물러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저 멀리 기련산맥 줄기가 한층 더 웅장하게 보인다. 산 아래는 청량하고 푸른 녹음으로 가득했다.
가히 서쪽의 강남도시라 불릴 만하다.
이 풍경은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향하던 고승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실크로드를 걸었던 대상들에게는 또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실크로드 여행을 할 수록 나는 수많은 이들이 그리워진다.
이제껏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실크로드의 벗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