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브라이슨
작가 수잔 브라이슨 | 출판 인향 | 발매 2003.10.29
이 책은 저자가 성폭력을 겪고난 후 2년 동안 쓴 글이다.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성폭력 이후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피해자들은 사건을 겪은 후 플래시백(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재현되는 것의 체험)과 악몽 때문에 오랜 시간 힘들다고 한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가 있어서, 피해자의 행실을 먼저 따져보는 사람도 있단다. 잘못은 가해자가 했는데,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또 왜 그런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저자에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어떤 일이 닥칠 경우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트라우마는 우리의 이러한 믿음을 산산이 부순다"고 한다. 인간은 극도의 공포에 빠지거나 당혹스러우면 평상심이 사라진다.
사실 본인을 제외한 타인은 그리 오래 힘겨움을 기억하지 못한다. 공감하지도 못한다. 피해자들은 이럴 때 고립감을 느끼며 더 힘겨워한다. 타인은 피해자가 겪은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그 일을 잊어버리라고 충고한다.
피해에 대해 기억하려는 노력을 억압하는 이런 상황은 트라우마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트라우마에 대한 어떤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가 끔찍한 운명에 처한 트라우마의 희생자와 공감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삶 또한 트라우마의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사람들이 느꼈던 현기증에 대해서 논의한 뒤, 다음처럼 묻고 있다. "자신들을 아프게 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현기증을 느끼도록 해야만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그는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다. 하지만 카자 실버만은 "만약 기억한다는 것이 자신의 몸으로는 겪어보지 못한 '상처'를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과 같은 일이라면,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상처에 의해 상처 입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트라우마로 인해서 산산이 부서진 자아를 다시 이어 맞추려 한다면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다시 기억해내고 그 기억을 정면통과 해야만 한다. 이런 과정 중에서 트라우마 생존자의 언어와 감정은 자신의 트라우마 이야기 속에서 하나로 모아질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정면으로 통과" 해야만 한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정면으로 통과하는 과정은 트라우마의 피해자, 성폭력 희생자 혼자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격려를 통해서 정면 통과의 과정은 이루어진다.
사실 여성들은 누구나 성추행 경험이 한번 이상 있다. 버스나 전철에서 불쾌한 행동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학교 선생이나 직장 상사 등에 의해 기분 나쁜 일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일명 바바리맨의 추잡한 행동을 목격하는 것도 있다. 이런 더러운 기억은 잊히지 않고 계속 남는다. 벌레가 닿은 것 같은 그 느낌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 성폭행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해자를 강하게 처벌하는 것과 더불어 성폭력 희생자가 회복하도록 공감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