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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노트 수현 Jan 03. 2018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등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사랑법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심장에 박힌 몇 개의 보석을 옮겨본다.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정재학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렁한 살 껍데기가 걸려 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맥박이 미친 듯이 뛰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톱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누군가 나의 성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그 칼이 내장을 드러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펄떡거리는 심장을 도려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담벼락의 비가 마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도저히 밥할 불이 아닌 촛불로 어머니가 계속 밥을 지으신다. 어머니! 사람들이 죽고, 사회는 병들고 부패해도 여전히 촛불로 밥을 지으시는 어머니! 촛불로는 밥을 짓지 못합니다. 어머니! 촛불로는.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 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여자들이 있다. 이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다.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어떤 남자들은 그런 여자의 좋았던 점을 나쁘게 포장해서 이별의 이유로 만든다. 여자는 상처를 안고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때를 회상하며 작품을 만든다. 가장 아팠던 순간과 작품 탄생의 순간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아무리 작품을 만들어도 해피해지지는 않는다. 단지 내 응어리와 슬픔을 풀어냈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뿐이다.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 쉽게 꿈꾸지 말고 / 쉽게 흐르지 말고 / 쉽게 꽃 피지 말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시간을 건너와서 그런가. 이제는 꿈도 안 꾸고, 흐를 생각도 없고, 꽃 필 봉우리도 없어서 그런가. 이 부분 읽는데 표정은 웃으며 눈물이 흐르는 이상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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