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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Nov 25. 2015

할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으셨다.

죽음이라는 건, 인간의 존엄이라는 건 대체


할아버지가 간 밤에 병원에 급히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설거지를 하다 소리내어 울었다. 하지만 작은 용종일 뿐이라 간단한 수술이면 된다길래, 놀란 맘을 진정시키고 춘천으로 향했다.



그 동안 바빴던 생활로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 병원에 모여 있었고, 그 가운데 할아버지는 볼 살이 다 빠진 채로 우리를 맞이하셨다. 병원에 실려가기 전 날까지도 운전을 하고, 농장을 돌보시던 할아버지였는데, 링거를 꽂은 채 간간히 입을 여시는 할아버지를 보니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드디어 수술을 집도할 의사와의 면담.

할아버지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단순한 용종이 아니라, 위암 3기 초반.

내시경 사진으로 본 할아버지의 위에는 매끈한 분홍색 살 밑으로 거멓게 암세포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수술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약한 폐와 심장으로 둘 다 수술 시, 고 위험군에 속한다고. 수술 후 회복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이라고. 하지만 수술을 하지 않고 놔두면 점차 암이 퍼져 위와 장이 연결된 부분이 막히고,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고. 그러니, 가족 분들이 잘 상의하셔서 수술 여부를 결정하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모였던 우리는 뜻밖의 상황에, 당장 수술 여부조차도 어찌해야할지 모를 상황에 놓였다. 외숙모는 충격으로 잠시 양 손이 마비되듯 경직되었고, 사촌오빠도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울고 있었다. 나는 아빠한테 울먹이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일단 수술을 미루고, 가족들이 생각해보기로 하고, 엄마와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엄마도 나도, 지금의 상황이 잘 실감나질 않았다. 다만 난생 처음 내 주변에 죽음의 일면이 다가오면서 아득히 멀리만 느껴졌던 죽음이, 상투적으로 느껴졌던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어가 내 앞에 또렷하게 서 있었다. 죽음이라는 게 그냥 한 순간 나를 이 땅에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서 점차 다가오는 것이구나. 별 달리 손 쓸 수도 없이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구나. 기본적인 생리욕구도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는 거구나.


전에 한 친구가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친구의 할아버지도 그 날 아침까지 멀쩡히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셨다고. 그런데 심장마비로 돌연 돌아가버리셨다고.



좋은 죽음같은 건 없어.
다 개죽음일 뿐이야.

정말 그런걸까. 할머니는 아직 상황을 모르시면서도 암이면 수술하면 안 된다고 계속 말하고 계셨다. 주변에서 수술했다가 오히려 고생만하고 일찍 죽었다면서. 평생을 다투시던 두 분이, 지금은 꼭 붙어서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모습에 자꾸 눈물이 난다.



낮에는 그런대로 잊고 지내다가, 잠자리에 누우면 할아버지 생각에 자꾸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 그 암 세포만 좀 거둬주시면. 아니면, 고통이라도 없게요.' 할아버지의 남은 시간이 고통 없이, 행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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